<악마를 보았다>의 플롯은 히어로물 영화와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악당에 의해 소중한 것을 잃게 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숨겨진 힘을 깨닫게 되거나 숨겨왔던 힘을 사용하기 시작해 히어로가 된다. 그 사이 악당은 계속해서 악행을 멈추지 않고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러면 어디선가 히어로가 나타나 초인적인 힘으로 악당을 제압한다. 악당은 히어로의 방해를 받아 잠시 물러나지만 다시금 자기의 세력을 키우거나 힘을 기르거나 히어로의 약점을 찾으며 반격할 기회를 노린다. 히어로가 방심한 사이 악당은 그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고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히어로는 오히려 각성하여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마침내 악당을 완전히 물리쳐 정의를 구현한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김수현은 히어로, 장경철은 악당으로 선명하게 대비된 캐릭터를 보였다. 특히나 장경철은 사람이라면 할 짓이 아닌 인륜을 저버린 잔인무도한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어 김수현의 활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쾌감을 선사해준다. 히어로물 영화에서 등장하는 악당들은 삐뚤어지고 사악하게 타락한 인격 때문에 애먼 사람들을 괴롭히고 세상을 지배하고자 악행을 저지르는데, 이런 설정은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과 거리감이 있어서 악당이 처치당할 때 느끼는 쾌감은 상대적으로 비현실적이고 가볍다. 장경철은 그러나 그 범행 대상이 나 혹은 나와 가까운 불특정의 평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또 범행의 이유가 단순히 그 사람이 자신보다 물리적으로 약한 존재라서,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해서,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따위였기에 김수현의 개입은 감정적으로 훨씬 밀착되어있는 우리에게 짜릿하기까지 한 희열을 주게 된다.
<악마를 보았다>가 히어로물 영화와 닮은 점은 이런 부분이다. 김수현은 장경철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동안에는 건드리지 않고 있다가 화풀이용으로, 아니면 욕정을 풀기 위해 타인을 해치려 할 때마다 별안간 나타나 방심한 그의 뒤통수를 친다. 마치 히어로처럼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나타나 범죄 피해자들을 구해주고 홀연히 사라지곤 한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히어로물 영화가 아니고, 김수현도 평범한 히어로와는 극명하게 다른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장경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끼니때가 되면 밥을 먹고 밤에는 자고 낮에는 일을 했다. 그러다 한가하게 시간이 비면 심심함을 달랠 놀잇감을 찾듯 범죄 대상을 물색했다. 그는 여자나 어린 학생, 노인들이 자신보다 약한 상대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첫째로 성욕을 해소하고 싶었고, 성욕 해소 뒤에는 자신의 범죄를 감춰야만 했고, 범죄를 감춰야 한다는 명분으로 살인했다. 그는 자기 범죄 사실이 드러나서 구속되지 않는 한 이 짓을 멈출 도리가 없었고, 멈출 만한 이유도 없었다. 심지어 김수현에게 쫓기는 와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해쳤고 오히려 자기의 일상이 침범당한 듯 시도 때도 없이 악행을 저질렀다.
장경철이 범죄를 멈추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했는지 김수현은 그를 계속해서 풀어주었다. 피라니아 한 마리를 금붕어만 사는 수조에 풀어주었다가 피라니아가 금붕어를 공격하면 건져 올려 칼로 찔러 고통만 주고 다시 수조에 풀어주기를 반복하듯이 했다. 교화를 위한 것인지, 학습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반복적인 술래잡기가 이어졌다. 피라니아의 본능은 피 냄새를 좇아 날카로운 이로 먹잇감을 물어뜯는 것이었다. 장경철은 마치 피라니아 같이 그의 본능을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살육과 악행을 그만두지 못했다. 반복적인 술래잡기에 지친 피라니아 장경철은 마침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고통스러운 연결고리를 끊어낼 방법을 모색했다. 금붕어가 아니라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를 먼저 공격하려는 아주 영악한 계획이었다.
장경철은 김수현의 원한을 사게 된 이유를 알아내고 자기가 죽인 김수현의 약혼녀 가족을 찾아냈다. 그리고 단란했던 한 가족을 파멸시켰다. 자신이 살해한 약혼녀의 아버지를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으로 폭행하고 아버지의 집을 찾은 하나 남은 딸마저 유린한 뒤 살해하여 길가에 버렸다. 그런 후 장경철은 태연하게 김수현을 약 올렸다. 고작 약을 올리기 위해 생명을 앗아갔다. 장경철은 자기 악행을 자랑이라도 하듯 희생된 사람의 피로 물든 몸뚱이를 대로 한복판에서 드러냈다. 김수현을 따돌리고 자수를 하여 감옥에서 무사히 복역하자는 게 그의 경악스러운 계획이었다. 이제 김수현도, 관객인 우리도 장경철을 향한 증오와 분노가 시뻘겋게 불타오르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얌전히 장경철을 보내줄 수는 없었다. 김수현은 대로 한복판에서 자수를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든 장경철을 경찰이 데려가기 전에 선수 쳐서 재빨리 납치해갔다. 그를 데리고 간 곳은 장경철이 악행을 자행해온 그의 근거지였다. 장경철은 단두대에 목을 길게 빼고 엎드린 채로 문고리까지 길게 이어진 줄을 입에 물고 있었다. 줄은 단두대 칼날을 붙잡아주고 있었다. 입에서 줄을 놓치면 단두대 칼날이 곧장 아래로 떨어져 장경철의 목이 잘리게 되는 구조였다. 김수현은 장경철을 거기 두고 그의 아들과 가족을 그 집에 불러낸 뒤 자신은 조용히 떠났다. 택시를 타고 온 장경철의 가족들은 창고에 있는 장경철을 발견하여 문을 열려했고 장경철은 줄을 놓치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장경철의 가족들은 집요하게 문을 잡아당겼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단두대의 무거운 칼날이 밑으로 빠르게 내리 꽂혔다.
복수를 마친 김수현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그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선량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아닌,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렸다. 현재 김수현에게 처한 현실은 조금도 낙관적인 데가 없었다. 극단적인 상황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모든 극단적인 방법을 총동원했다. 극단적인 방법에는 극단적인 결과만이 주어지게 되었다. 그는 장경철을 물리쳤지만 극도의 무력감을 느꼈다. 장경철이 죽어도 그의 비극적인 현실은 변할 리 만무했다. 김수현은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그의 정신은 완전히 망가지고 피폐해졌다.
이제 이 과하고 극단적인 상황을 조금씩 축소해서 우리 일상에 접목시켜 보았다. 우리는 김수현에 완벽히 감정이입을 했고, 장경철을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했다. 아마도 우리 스스로를 김수현에 가까운 존재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장경철에 감정을 이입해 김수현에게서 벗어나기를 응원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장경철과 같은 부류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장경철이 매우 극단적인 인물이라서, 또 그의 악행이 워낙 순수악이라서 절대 나는 장경철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생각이 들뿐이지, 장경철의 본질적인 속성을 잘 생각해 보면 이러한 종류의 인간은 의외로 우리와 비슷한 데가 상당히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본디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기 입장에서만 바라볼 줄 알고, 역지사지가 불가능하며 타성에 젖어 있다면, 또 누군가가 지켜보거나 법으로 금하지 않는 이상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면, 또 자기 손해를 피하기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자기 위주로 움직인다. 그럼에도 쾌락이나 만족을 위해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정도의 범위가 매우 극단적이지 않은 이상 우리의 행동을 쉽게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며 '그럴 수 있는' 영역에 둔다. 우리와 장경철이 가지고 있는 차이는 아주 미묘하게 나타난다. '그럴 수 있는' 영역이 장경철은 우리보다 훨씬 넓을 뿐이다.
만약 누가 보지 않는다면, 누구도 법으로 막지 않는다면, 누구도 비난하거나 비방하지 않는다면, 아니면 그런 위치에 있다면, 우리는 좀 덜 눈치 보고, 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자신의 잇속 챙기기를 마다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이 정도는 누구나 한다. 안 하면 바보다, 손해다.
매일 아침, 저녁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면서 나는 '그럴 수 있는' 영역을 좀 더 넓힌 사람들을 마주한다. 앞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뒤에서 떠미는 사람들, 내릴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냉큼 지하철에 올라타는 사람들, 다 자기 자신을 위한 마음이 앞선 행동을 전혀 거리낌 없이 하는 모습들이다. 단 하나의 작은 행동도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위한 결과만을 바라고 선택하고 결정한다. 장경철의 본질은 사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영화를 보면 법과 사회 질서가 망가져 어지러워진 사회상을 그려내고 그 사회를 이룬 구성원들의 패악한 행위가 당연지사 뒤따라온다. '악마'란 다른 것이 아니다. 나의 행복과 나의 유익만을 위하는 존재 자체가 '악마'이다. 요즘 들어 자기 행복 추구를 위한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풍조가 점점 사회 질서를 유지해오던 선을 아슬아슬 위태롭게 넘나드는 것을 보곤 한다. 이제 성 관념도, 윤리의식도 자기 행복이 우선시 되어 그 기준선이 희미해지고 있다. 잘못된 기준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어지럽히게 될까? 그것은 과학적으로도 잘못 설정한 기준점이 완전히 거짓된 데이터를 내놓는 것만 보아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진다는 의미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면, 어쩌면 지금은 극단적으로 악에 치우쳐 보이는 장경철마저도 '그럴 수 있는' 영역 가까이까지 다가오게 된다는 뜻이 된다. 오늘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라도 내일은 당연하지 않게 되는 그런 경우는 늘 일어난다. '당연하다'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옛 것을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이유가 뭘까? 정당한 근거가 있는 걸까? 단순히 옛 것이기 때문이라는 불명확한 '느낌' 때문은 아닐까? 모든 존재의 이유와 의미가 명확하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그 이유와 의미보다 존재 자체만이 남아 타성에 젖어버리면 이유와 의미가 희미해지고 '존재'에 대한 의구심과 회의감을 갖게 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김수현'으로 믿는 장경철이 되지 않으려면 타성에 젖은 인간성에 대해 한 번쯤 깊이 숙고하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자신을 '김수현'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나약하고 자기만 알고 자신보다 조금만 약해도 태도가 달라지는 내면의 실체를 마주하지 못하는 '장경철'들의 세상이니까 말이다.
내가 만약 김수현이었다면, 내 안에 본디 살아있던 악마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려 했을까? 아무리 노력해도 곱게 처리할 방법은 떠오르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