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낮추는 기술이 아닌, 자신을 아는 용기”
“겸손은 미덕이다.”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들어온 말이다.
그러나 그 말속에는 늘 모순이 숨어 있었다.
겸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왜 우리는 그것을 미덕이라 부르면서도, 때로는 그 말에 눌려 살아갈까?
어린 시절의 그림자
초등학교 때 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마음은 뿌듯했지만, 입 밖으로는 늘 이렇게 말했다.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사실은 열심히 준비한 끝에 얻은 결과였다.
그런데 왜, 나를 축소하는 말을 먼저 했을까?
아마도 ‘겸손은 나를 감추는 것’이라 배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성격이 밝고 늘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말했다.
“얘야, 좀 나대지 마라.”
그 말은 억압처럼 들렸지만,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공동체 속에서 모두가 불편하지 않도록 균형을 지키려는 가르침이었다.
그럼에도 어린 마음속에는 질문이 남았다.
‘나를 드러내는 건 왜 나쁜 일일까?
한국의 겸손 ― 체면이라는 안전망
공동체 중심의 문화 속에서 한국인은 늘 조화와 체면을 중시해 왔다.
한 사람이 지나치게 앞서면 집단의 균형이 무너지고, 결국 모두가 불편해진다.
그래서 “나대면 미움받는다”는 말이 자연스레 굳어졌다.
겸손은 조화를 위한 미덕이지만, 지나치면 자기 축소로 흐른다.
“별거 아니에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진짜 나를 작게 만들어버리는 것.
그때부터 나는 자주 생각했다.
그렇다면 겸손은 어디까지가 배려이고, 어디서부터는 불필요한 굴종일까?
영국의 겸손 ― 절제와 존중의 품위
영국에서 만난 겸손은 달랐다.
사람들은 성취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당당히 드러냈다.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노력에 대한 정직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균형이 있었다.
“나는 잘했어.” 뒤에는 “하지만 팀이 함께 해냈어.”라는 말이 따라온다.
손흥민 선수가 경기 후 늘 팀을 먼저 언급하는 모습이 그 전형이다.
일상 속에서도 겸손은 절제와 친절로 드러났다.
줄을 설 때 차례를 지키고, 낯선 이에게 문을 열어주는 작은 행동들.
영국에서 겸손은 고개를 숙이는 몸짓이 아니라, 상대를 동등하게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 배경에는 오랜 젠틀맨 문화가 있다.
겸손은 스스로를 낮추는 태도가 아니라, 절제와 품위를 통해 타인을 존중하는 힘이었다.
그래서 영국식 겸손은 “나는 너보다 낮다”가 아니라,
“나는 너와 함께 높아진다”는 메시지를 담는다.
그러나 이 젠틀맨적 겸손이 언제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남아 있는 나날》은
품위와 감정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집사 스티븐스는 평생 ‘품위 있는 삶’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숨기고,
주인의 뜻에 순종하며 자신을 철저히 통제한다.
그러나 그 절제의 끝에서 그는 사랑을 붙잡을 용기를 잃고 만다.
품위가 지나쳐 진짜 마음을 억눌러 버린 것이다.
두 얼굴을 넘어
한국의 겸손이 체면 속 자기 축소로 흐르듯,
영국의 겸손도 절제라는 이름 아래 자기 억압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두 문화를 모두 경험하면서 알게 되었다.
겸손은 무조건 자신을 낮추는 것도, 끝없이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겸손은 결국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아는 힘이다.
내 부족함을 인정하는 용기,
타인의 장점을 기뻐하는 여유,
그리고 함께 성장하려는 열린 마음.
어쩌면 “나는 이것을 잘한다”라고 말하는 것도 겸손일 수 있다.
자신을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다른 이를 온전히 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겸손은 문화마다 다른 언어를 입는다.
한국에서는 체면과 조화 속에서,
영국에서는 절제와 존중 속에서.
표현은 달라도 그 안에 담긴 뜻은 같다.
“나는 당신을 존중한다. 나는 당신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
겸손은 그래서 힘이 된다.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고,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문화는 달라도, 겸손이 인간을 성숙하게 만든다는 진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을 아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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