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표를 벗고, 나로 서다

역할의 무게에서 벗어나, 호흡을 되찾는 법

by 양수경

결혼 후, 나는 몇 개의 이름을 얻었다.

‘좋은 아내’, ‘좋은 엄마’, 그리고 일터의 ‘성실한 사람’.


그 이름들은 따뜻해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 어깨를 묵직하게 눌렀다.

그건 본래의 이름이 아니라,

타인이 내게 붙여준 역할의 이름표였다.


나는 한동안 남의 필요에 내 시간을 맞췄다.

남편의 기대를 채우고, 아이의 요구를 먼저 돌보고,

일터의 요청 앞에 성실히 서 있었다.

헌신 뒤에 남은 것은 충만이 아니라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와 고단 함이었다.




나는 ‘무엇을 하느냐(doing)’로만

자신을 설명하며 버텨 왔다.

그러나 ‘존재(being)’의 나는 오래 비어 있었다.


역할은 어떤 시기엔 꼭 필요한 옷이다.

그 옷엔 이름표가 달려 있다.

‘역할=이름표=옷’ 은 나를 보호하지만, 때로는 나를 가린다.

하지만 그 옷이 오래 붙어 있으면

어느 날 옷을 벗는 순간, 숨이 먼저 헐떡인다.

그때 알게 된다.

내가 옷이 아니라 ‘호흡’으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다 문득 물었다.

“만약 ‘아내’와 ‘엄마’, 그 모든 이름을 벗겨 낸다면… 나는 누구일까?”

가슴이 서늘해졌지만, 동시에 알았다.

그 물음 앞에 서야만 진짜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작은 시도부터 시작했다.

하루 중 아주 잠깐이라도 내 몫의 시간을 남겨 두기.

오래 꽂아 둔 책을 다시 펼치기.

아무도 찾지 않는 새벽길을 혼자 걸어 보기.


그 짧은 순간들 속에서

나는 ‘엄마도 아내도 아닌 나’로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잃었던 것은 시간이 아니라 호흡이었다는 것을.


역할에 나를 과도하게 겹쳐 놓으면

역할이 흔들릴 때 자아도 함께 흔들린다.

아이는 자라고 떠나고, 명함은 바뀌고,

무대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영원하지 않은 것에 나를 전부 의탁할수록

내 호흡은 얇아지고 빨라졌다.




그래서 나는 이름표를 한 장씩 떼어 내 보기로 했다.

역할을 흠잡히지 않게 해내려는 마음보다,

내 안의 평온을 먼저 돌보는 연습.

오늘의 나에게 가능한 것만 남기며,

조용히 나를 세우는 연습.


완벽한 아내가 아니어도, 모범적인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흠집 난 모습 속에서도

본래의 내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로 서자 역할도 더 따뜻해졌다.

‘아내’와 ‘엄마’의 자리는 의무가 아니라

관계의 호흡으로 다시 다가왔다.


무대 중앙에서 박수를 받아야 하는 배우가 아니라,

햇살 아래 서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비로소 자연스러운 숨을 배웠다.


이제 나는 안다.

역할의 옷을 벗어던진 자리에서

처음으로 깊은 호흡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 호흡이 내게 이름을 돌려주고,

그 이름으로 나는 오늘도 길을 걸어간다.






#역할을 벗고 나다워지기#존재와 자유#Doing과 Being#삶의 호흡 되찾기#자기 돌봄







이전 02화가면을 벗는 연습- 진심으로 숨 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