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대신 존재로 서는 법
우리는 왜 그렇게 자주 자신을 설명하려 할까.
이해받고 싶은 마음과 오해받을까 두려운 마음이,
말의 양 끝에서 흔들린다.
나도 그랬다.
나는 종종 내 선택을 해명하듯 살아왔다.
상대가 서운해하지 않도록 덧붙이고,
오해하지 않도록 길게 풀어내며,
내 진심을 증명하려 애썼다.
‘옷 예쁘다”라는 말엔
“아, 세일해서 산 거야”라는 돈 쓴 이유를 덧붙였고,
잠시 여유를 즐길 때도
“정리할 게 있어서…” 라며 시간을 합리화했다.
“일 잘한다”:라는 칭찬에는
“운이 좋았던 거야.” 라며 스스로를 낮췄고
“오늘 모임 못 가”라는 말에는
그저 쉬고 싶다는 대신
끝내 이유를 달아야만 마음이 놓였다.
나는 늘,
설명 속에서 나를 지켜내려 했다.
설명은 내 선택을 정당화해 주는 듯했지만,
그 밑바닥에는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관계를 잃을까,
무책임해 보일까,
오해받을까.
때로는 그것이 나를 이해해 달라는
소심한 소통의 시도이기도 했다.
나는 단지,
연결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설명은 통제의 언어다.
불안을 달래려 말이 늘어나고,
그 말을 진심과 혼동한다
긴 설명 끝에도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나는 더 작아지고, 더 지쳐갔다.
설명이 반복될수록
내 안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졌고,
관계는 해명으로 유지되는 피곤한 무대가 되어 버렸다.
설명은 나를 보호하는 갑옷 같았지만,
그 갑옷이 서서히 나를 조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화 도중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억지로 덧붙이지 않고,
그저 침묵 속에 나를 남겨두었다.
말 대신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고요 속에서, 마음 한켠이 천천히 식어갔다.
“오늘은 그냥, 마음이 그러해서.”
그 한 문장에는 모든 이유가 들어 있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마치 오래 닫혀 있던 문이 살짝 열리는 것처럼.
말을 줄이자,
방 안에 고요가 번졌다.
상대는 더 묻지 않았고,
나는 더 지치지 않았다.
그 후 나는 조금씩 배워갔다.
모든 오해를 풀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모든 진심을 다 말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
때로는 설명보다
짧은 눈길, 고요한 미소,
차 한 잔의 온기가
더 많은 것을 전한다는 것을.
설명은 불안을 잠재우려는 자기 방어였지만,
결국 그 불안 속에
나를 가두는 감옥이기도 했다.
고요는 그 감옥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설명을 멈추자,
내 안에 남은 것은 억울함이 아니라 평안이었다.
타인을 설득하지 않아도,
나는 내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이제 안다.
설명이 멈춘 자리에서,
비로소 고요가 찾아온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나를 다시 만났다.
설득이 아니라, 존재로 산다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마지막 자유였다.
[에필로그]
그림자를 지나, 빛을 향해
그림자와 가면,
이름표와 시선,
그리고 설명으로 지탱되던 내 모습은
결국 모두 ‘타인의 기준에 맞춘 나’였다.
나는 그 속에서 조금씩 지쳐갔고,
숨을 잃어갔으며,
내 본래의 얼굴을 잊어갔다.
그러나 멈추어 선 자리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작은 거절과 침묵,
햇살 한 줄기와 짧은 숨결이
나를 다시 살려낸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내가 내 목소리를 내는 순간,
비로소 ‘나’라는 이름이 되살아난다는 것을.
진짜 자유는 누군가를 설득하지 않아도
고요히 존재할 수 있는 마음의 자리에서 피어난다.
그 자리에 선 지금,
나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조용히 숨 쉬며,
내 빛을 향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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