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은데, 왜 늘 괜찮다고 말할까.”
누구에게나 익숙한 문장이다.
나 또 한 그 말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고,
관계를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마다 내 감정의 경계선은 조금씩 허물어졌다.
어느 날, 지인들과 식사 자리였다.
테이블 위에는 고기 접시와 반찬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고,
공기에는 숯불 냄새와 웃음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이미 배가 충분히 불러 더는 먹을 수 없을 정도였는데,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내 접시에 고기를 올려주며 말했다.
“이거 진짜 맛있어. 더 먹어.”
순간,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거절하고 싶었다.
“괜찮아요, 전 이미 배불러요.”
마음속에서는 분명 그 말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입술은 내 뜻을 따라주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 한마디와 함께 내 접시에는 고기 한 점이 더 놓였다.
그러나 결국 내가 씹어 삼킨 건 고기만이 아니었다.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는 나의 ‘괜찮아요’까지 함께 삼켜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곱씹은 건 음식 맛이 아니었다.
‘왜 나는 또 괜찮다고 말했을까.’
순간의 평화를 지킨 대가로,
나는 내 안의 솔직함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비슷한 장면은 식사 자리가 아니어도 늘 있었다.
회의 자리에서 내 몫이 아닌 일이 은근히 떠넘겨졌을 때,
나는 또다시 미소로 대답하곤 했다.
“네, 제가 해볼게요.”
사람들은 고마워했고,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퇴근길, 내 어깨에 맨 가방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내 마음 위에도 억지로 내뱉은 예스가 돌덩이처럼 얹혀 있었다.
“괜찮아요”
그 말은 따뜻하다.
그 한마디에 공기는 부드러워지고,
어색한 침묵은 눈 녹듯 사라진다.
상대의 어깨에서 짐을 덜어주고,
관계의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낸다.
하지만 그 말은 때로 나를 지우는 주문이 된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서도 억지로 웃으며 “괜찮아요”를 말할 때,
나는 내 마음을 뒷주머니에 접어 넣는다.
겉으로는 환한 미소지만,
속으로는 씁쓸한 울림이 번진다.
“나는 사실 괜찮지 않은데.”
어린 시절, 그 말은 입 밖에 내기도 전에 이미 금기어였다.
밥상 위에서 막내동생이 내 반찬을 집어도
“싫어요” 대신 젓가락을 슬며시 거둬야 했다.
놀이터에서 또래와 놀고 싶었지만,
언니라서 여동생을 챙겨야 했다.
내게 있어서 “싫어요”라는 말은
입술 끝에서 사라지는 무례함이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말하는 법도,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연습도 낯설어졌다.
Yes라고 말하면 모두가 평안했고,
나는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 선택은 어느새 내 옷이 되어버렸다.
그때 나는 사랑을 얻기 위해
나 자신을 잃어도 된다고 믿었다.
심리학은 이를 ‘자기부정(self-denial)’이라 부른다.
괜찮다는 말의 그림자에는
갈등을 피하려는 두려움,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
거절하면 멀어질까 하는 불안이 숨어 있다.
그래서 “괜찮아”는 양날의 검이다.
타인을 위로하는 동시에, 나를 부정하기도 한다.
거절은 누군가를 밀어내는 말이 아니다.
때로는 나를 지키는 선언이다.
“나는 지금 이 선택을 원하지 않는다.”
그 한마디가 관계를 숨 쉬게 하고,
나를 더 오래 버티게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호흡 같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박자가 맞을 때도, 어긋날 때도 있다.
모든 부탁에 예스를 남발하면,
내 “예스”는 가벼워진다.
그러나 분명한 “노”를 아는 사람의 “예스”는 무게가 있다.
그 무게가 곧 신뢰다.
거절은 관계를 끊는 칼이 아니다.
창문을 여는 손잡이다.
창을 살짝 열어두어야 바람이 드나들고,
바람이 드나들어야 오래 머물 수 있다.
억지 예스는 돌덩이처럼 무겁다.
어깨에 올려놓는 순간, 몸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반대로 솔직한 노는 깃털처럼 가볍다.
내 손에서 흘려보내는 순간, 바람에 실려 자유롭게 흩어진다.
거절은 닫힌 문이 아니다.
오히려 진짜 관계를 향해 열리는 창이다.
내가 나를 존중하듯,
상대도 진짜로 나를 대할 수 있는 길이다.
억지 예스로 이어진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솔직한 노 위에 세워진 관계는 더 깊어진다.
진짜 동의란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서만 가능하다.
무게 없는 동의, 자유로운 거절.
그 둘 사이의 균형 속에서만 우리는 온전히 존재한다.
창문 너머로 빛이 스며드는 방 안, 나는 홀로 앉아 있었다.
외로움은 누군가의 부재가 남긴 그림자였지만,
고독은 나와 마주 앉는 빛이었다.
그 방은 내게 연습장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싫다”라고 말하는 연습을 했다.
고독이 내 목소리를 되찾아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되찾은 목소리는 결국 사랑을 지키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결국, “싫다”라고 말할 용기는 단순한 거절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지키는 방패이자,
관계를 숨 쉬게 하는 간격이며,
자유를 회복하는 선언이다.
괜찮지 않은 날에는,
괜찮지 않다고 말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 한마디가 나를 살리고,
내 감정의 경계를 다시 세워준다.
그리고 그 후에야 비로소,
“이제 괜찮아요”가 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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