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런던, 젖은 ID 카드와 마침표 찍기”
식탁 위에는 주일학교 설교 노트가 펼쳐져 있고, 그 옆에는 막 개어놓은 빨래가 산처럼 쌓여 있다. 건조기에서 막 꺼낸 티셔츠의 따뜻함이 손끝에 머물 때, 나는 그 온기를 조금 더 붙잡고 싶어 괜히 천을 한 번 더 쓸어내렸다. 하지만 내 손은 집에 머물러 있는데, 마음은 자꾸만 딴 데로 가버렸다.
방금 전 상담실에서 스쳐 지나간 어느 내담자의 표정. “괜찮아요”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을 아주 잠깐 드러냈던 그 찰나의 순간이, 화면이 꺼지지 않는 영상처럼 머릿속에서 자꾸만 재생되었다. 싱크대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 전기포트가 끓기 직전의 낮은 떨림, 창밖을 지나는 버스의 둔탁한 바퀴 소리. 집 안은 이토록 현실적인데, 나의 정신은 여전히 상담실의 정적 속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양말 한 짝을 접다 말고 멈춰 서서, 숨을 들이쉬며 아주 작게 읊조려 보았다.
“지금은 집.”
그 말이 입술을 지나가자마자, 마음은 한 박자 늦게 나를 따라왔다.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 센터로 출근한다. 달력만 보면 꽤 여유로운 일정이지만, 나에게 ‘일’은 결코 달력 안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출근하지 않는 날에도 나는 자꾸만 마음속 일터로 출근한다. 마트 통로를 걷다가 멈칫하고, 아이가 건네는 말에 대답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상담실에서 건넸어야 할 대답을 찾느라 분주하다. ‘그때 더 천천히 물었어야 했나?’ ‘내 말이 너무 차가웠을까?’ 같은 의문들이 접시 위의 거품처럼 자꾸 떠올랐다. 몸은 집에 있지만 마음은 늘 늦게 도착하는, 퇴근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센터에 출근하는 아침이면 나는 평소보다 더 단정하게 옷을 챙겨 입는다. 옷이 마음의 스위치를 켜는 신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닫을 때 나는 “딸깍” 소리는 오늘 하루의 톤을 정하는 시작음이다. 전철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지극히 멀쩡해 보였다. 멀쩡한 얼굴을 만드는 것은 나에게 가장 오래된 기술 중 하나였으니까.
상담실 문을 닫으면 세상 소리는 한 겹 얇아진다. 정해진 50분 동안 나는 전력으로 달린다. 듣고, 끄덕이고, 적고, 다시 듣는다. 어떤 날의 침묵은 너무 무거워 내 의자와 손등, 공기 위에까지 내려앉는다. 나는 그 무게를 대충 넘기지 못해 자꾸 ‘조금만 더’를 선택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고, 조금만 더 안전하게 정리해주고 싶은 마음. 하지만 그 ‘조금만 더’가 쌓여 나 자신이 비어버리는 날, 나는 타인의 무게와 나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위험한 상태에 빠지곤 했다.
동료 사라는 나와 달리 오후 5시가 되면 정말로 ‘오후 5시의 사람’이 되었다. 노트북을 닫는 그녀의 “딱” 소리는 기분 좋은 마침표처럼 들렸다. 하루가 사람을 온전히 집으로 데려다주는 그 방식이 부러워 어떻게 그렇게 딱 끊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사라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지쳐 쓰러지면 누가 그들을 돌보겠어? 나를 지키는 게 결국 그들을 돕는 거야.”
그 말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책임감으로 다가왔다. 나에게 책임감이란 늘 더 오래 버티고 정(情)으로 붙잡고 있는 얼굴이었는데, 사라는 나에게 다른 종류의 책임감을 가르쳐주었다.
비가 내리던 어느 퇴근길, 집 앞에 도착해 불이 켜진 창문을 바라보며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으면 내 안의 무언가가 한꺼번에 쏟아질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현관 앞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오늘 일을 했나, 아니면 나를 소모했나?”
그 질문 끝에 나는 내 몸이 얼마나 얇아졌는지, 내 속이 얼마나 식어버렸는지를 처음으로 인정했다. 내 평온을 지키는 것 또한 누군가를 돕는 일의 중요한 일부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나는 매일 아주 작은 마침표를 찍는 연습을 한다. 상담실 문을 닫고 손잡이를 놓기 전, 잠깐 멈춰 서서 숨을 고른다. 마음속 메트로놈의 박자를 ‘일터의 Hannah’에서 ‘집안의 한나’로 바꾸며 나에게 문장 하나를 건넨다.
“오늘은 여기까지. 지금은 집으로.”
이것은 게으름도, 도망도 아니다. 일과 쉼의 경계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상담사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책임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일이 나를 삼키지 않아야 내가 누군가를 오래 품을 수 있고, 내 삶의 중심에는 일하는 내가 아니라 ‘존재하는 나’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빨래를 접으며 손끝에 닿는 면의 감촉에 집중한다. ‘조금만 더’라는 유혹 대신, 기꺼이 이 한마디를 선택한다.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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