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도 통풍이 필요하다

by 양수경


런던에 비가 일주일째 내리고 있다. 비라고 하기엔 안개처럼 가늘고 촘촘해서, 창밖 풍경은 늘 젖은 연필로 한 번 문질러 놓은 듯 흐릿하다. 하늘은 낮은 회색이고 공기는 물을 잔뜩 머금은 솜이불처럼 무겁다.


제습기 물통은 하루 반나절 만에 비워달라고 붉은 불을 깜빡이고, 빨래는 이틀째 눅눅한 냄새를 풍기며 건조대 위에 축 늘어져 있다. 집 안의 모든 사물이 물기를 머금고 퉁퉁 불어 있는 것만 같다.


주말 오후, 거실은 가족들로 꽉 차 있다. 남편은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리모컨을 쥐고 있고, 아이는 바닥에 장난감을 늘어놓은 채 “엄마, 심심해”를 돌림노래처럼 반복한다. TV 소리, 아이의 칭얼거림, 빗소리가 한데 섞여 거대한 웅덩이처럼 고여 있다.


식탁 구석에 앉아 책을 펴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누군가 지나가며 내 의자를 툭 치고, 누군가 물을 마시며 컵을 탁 내려놓는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쉬지 않고 내 이름을 부른다. “엄마”, “여보”, “한나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분명 목숨보다 사랑하는 가족인데, 순간 명치끝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든다. 가족들이 내뿜는 날숨과 체온이 거실 안에 꽉 차 있어 산소가 희박하다. 서로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마음의 통풍이 되지 않는다. 사랑은 따뜻함이라고 배웠는데, 오늘의 사랑은 덥고 끈적한 땀처럼 불쾌하게 피부에 달라붙는다.


나는 도망치듯 우산을 집어 들고 현관을 나선다. “잠깐 쓰레기 좀 버리고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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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젖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자 그제야 살 것 같다. 쓰레기통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옆집 정원 쪽에서 ‘툭’ 하는 건조한 파열음이 들렸다.


옆집 할머니 마가렛(Margaret)이었다. 비옷 모자 아래로 뻣뻣한 회색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있고, 장갑 낀 손에는 투박한 전정가위(secateurs)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비를 맞으며 장미 덤불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마가렛, 비 오는데 뭐 하세요?”


내 물음에 마가렛은 장미 줄기 사이로 손을 넣어 두 개의 가지가 맞닿는 지점을 확인하더니 무심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크게 자르는 날이 아니야. 이런 건 보이면 바로 정리해야 해.”그녀가 빽빽하게 얽힌 줄기 하나를 가위로 잡았다.


“서로 비비는 가지는 그대로 두면 상처가 나거든.”


‘툭.’


잘려 나간 것은 손바닥 길이만 한 가느다란 가지였다. 끝에 작은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왔다.


“아깝게….”


마가렛이 허리를 펴며 빗물 젖은 안경 너머로 나를 보았다.


“Hannah, 장미는 욕심을 부리면 금방 병들어. 가지들이 서로 닿아 있으면 잎이 마르질 않거든. 공기가 안 통하니까.”


그녀는 장미 덤불의 캄캄한 안쪽을 가리켰다.


“이렇게 빽빽하면 비가 그친 뒤에도 속은 계속 젖어 있어. 그러면 잎에 검은 점이 생기는 흑반병(black spot)이나, 하얗게 곰팡이가 피는 흰 가루병(mildew)이 와.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에서부터 썩는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우산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린 손가락 마디가, 마치 물기를 잃고 비틀린 죽은 가지처럼 보였다. 명치끝, 갈비뼈 안쪽 어딘가에도 거뭇한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겉은 화목해 보여도 속은 습기에 잠식당하고 있었던 건, 장미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마가렛은 이번엔 덤불 안쪽으로 비스듬히 자라나 다른 가지를 찌르고 있는 줄기를 집어 들었다. 망설임 없이 가위질을 했다.


‘툭’.


잘린 자리 사이로 작은 빈 공간이 생겼다. 그 틈으로 바람이 지나갈 길이었다.


“서로 닿지 않아야, 둘 다 오래 꽃을 피우는 거야.”


그 말이 이상하게도 내 몸 어딘가를 시원하게 만들었다. 잘려 나간 것보다, 그 자리에 생긴 틈이 먼저 느껴졌다.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하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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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의 집은 따뜻하고 건조했다. 문을 닫자 바깥의 젖은 공기가 뚝 끊겼다. 식탁에는 방금 다녀간 듯한 누군가의 흔적이 있었다. 영수증 뭉치와 현금 봉투 몇 장. 봉투 겉면엔 펜으로 ‘Harry’라고 적혀 있었다.


“아들 해리가 다녀갔나 봐요?”


“응. Housekeeping(생활비) 두고 갔어.”


“하우스키핑… 요?”


독립했다가 잠시 집에 들어와 산다는 아들이, 엄마에게 돈을 낸다고? 한국에서 온 내게는 자식에게 생활비를 받는 부모가 낯설다 못해 조금 야박해 보였다. ‘가족’이라는 말은 원래 조건 없이 품어주는 쪽으로 기우는 단어라고 믿어왔으니까. 마가렛은 돋보기안경을 벗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성인이 됐잖아. 한집에 살면 책임을 나누는 게 당연하지. 전기, 수도, 음식… 그 애 몫이니까.”


“그래도… 사랑하는 아들이잖아요.”


마가렛은 뜨거운 찻잔을 입으로 호호 불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공짜 점심은 아이를 영원한 손님으로 만들 뿐이야, Hannah. 사랑하니까 받는 거야. 스스로 설 수 있게.”


그리고 덧붙였다.


“품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야. 때로는—밀어내서 거리를 만들어 주는 것도 사랑이지.”


마가렛은 봉투들을 모아 ‘Harry’ 라벨이 붙은 유리병에 넣고 서랍을 닫았다. ‘탁’. 서랍 닫히는 소리가 아까 정원에서 들었던 가위질 소리처럼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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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에서 피어오른 김이 내 안경을 뿌옇게 덮었다. 시야가 흐려지며 훅 끼쳐오는 뜨거운 습기. 그 감각이 순식간에 나를 아주 오래된 기억 속의 부엌으로 데려갔다.


종갓집이었던 어린 시절, 명절이면 우리 집 부엌은 늘 찜통 같았다. 솥에서는 하루 종일 김이 뿜어져 나왔고, 엄마는 땀에 젖은 앞치마를 두른 채 팽이처럼 돌았다.


그때의 나는 ‘도움’이 뭔지 몰랐다. 그저 엄마가 숨 쉴 구멍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내가 식탁을 닦고, 동생들을 달래고, 사촌들의 울음소리를 막아내면 엄마의 얼굴이 아주 잠깐 밝아졌다. 나는 그 표정을 지키고 싶어서 내 시간을, 내 체력을 땔감처럼 태워 엄마의 부엌에 던져 넣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에게 사랑은, 나를 닳도록 써서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라는 뜻으로만 남기 시작한 게. 그렇게 밀착되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믿어온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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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의 집을 나설 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 손잡이를 쥔 채 정원을 다시 돌아보았다. 장미 덤불 한가운데, 아까 ‘툭’ 잘려 나간 자리. 그 사이에 생긴 빈 공간이 이상하게 반듯해 보였다. 누군가 일부러 길을 내둔 것처럼 시원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거실은 여전히 북적였다. TV 소리와 아이의 칭얼거림이 공기 중에 둥둥 떠다녔다. 습한 공기는 그대로였는데, 내 마음은 아까와 조금 달랐다. 아이가 나를 발견하고 습관처럼 불렀다.


“엄마, 물 줘.”


예전 같았으면 몸이 스프링처럼 튀어 나갔을 것이다. 컵을 찾고, 물을 따르고, 아이 입에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움직이지 않았다. 신발을 벗으며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냉장고에 있어. 네가 꺼내 마실 수 있지?”


아이는 잠깐 멈칫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 정적의 순간, 내 귓가에 아까 들었던 그 소리가 환청처럼 스쳐 지나갔다.


툭. 그것은 내 안의 썩은 가지 하나가 잘려 나가는 소리이자, 아이와 나 사이에 시원한 바람길이 열리는 소리였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기다렸다. 죄책감이 습기처럼 올라오려 했지만 꾹 눌렀다. 아이는 천천히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컵을 꺼내고 물을 따랐다. 꼴꼴 꼴 물 따르는 소리가 들리고,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식탁 위로 평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뿐이었다.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의자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았다. 유리에 서린 김이 아까보다 조금 옅어진 것 같았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게 중요한 건, 숨이 조금 더 편하게 들어온다는 감각이었다.


창밖의 빗소리가 아까보다 아주 조금, 더 가볍고 명쾌하게 들렸다. 내 마음속 정원에도—바람이 지나갈 길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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