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gela Dec 08. 2019

영화, 결혼 이야기, 2019

알고 보면 뉴욕과 LA 사이의 거리

요즘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이다. 스마트 폰으로 볼 수 있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여러 번 나눠서 보기도 한다. 이 영화는 두어 번 나눠 봤는데, 다 보고 나서 이게 다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들더라.

부부란, 알고 보면 키워 준 부모보다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때로 때려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다가도 혈연으로 묶여 어쩔 수 없이 다시 화해하고 이해하고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부모 형제들 만큼이나 그 '가족'이라는 테두리 속에 혈연과 상관없이 견고하게 씨줄 날줄이 엮이는 관계가 되게 마련이다.

 영화를 만든 노아 바움백 (Noah Baumbach) 감독은 1995년부터 각본과 연출을 시작한 실력파 감독으로 이후 많은 영화를 직접 각본 연출을 맡아 해왔고 주로 미국 사회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두고 기획한 작품( https://g.co/kgs/gVQgna) 다수다.  영화는 2019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조커가 수상한 황금 사자상 후보에도 올랐다.



-  이후 스포 다수 있으나, 연기자들의 연기가 훌륭하고 작품의 디테일이 중요한지라 크게 상관없지 싶다. -


https://youtu.be/rDg0W6-0BHE


작품은 기승전결로  나누어져 매우 세련되게 기획된  편의 연극처럼 드라마가   없이 메꿔지고  핵심이  사람들의 감정선과  어우러져 그 정점에 이른다. 이혼 과정에서 페미니즘적 시각도 적절히 변주해 넣었는데  영화에선 도리어 찰리가 아들 헨리에게 보이는 사랑이 거의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처럼 처절해 보여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한다. 결혼해 아이를 낳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거의 이해 영역에 들지 못하지 싶을 만큼 자식에 대한 사랑은 삶에 있어 소중히 여기던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대부분 최후에 마지막으로 남은 자기 자신까지는 포기할  없어 결국 아이는 음과 양으로 나눠진 세계 사이에 홀로 남겨지게 마련이다. 아버지이자 남편이던 자신이 자기 야망으로 매몰되어 물불 안 가리고 앞으로 내달리는 와중에 아내는 자기실현이 무시되고 무가치한 인간으로 사그라져 간다고 느끼며 고통받을  무관심으로 일관해 오면서 누적된 아내의 불만과 이로 인한 갈등의 와중에 찰리가 불륜을 저지르게 되고 이를 알고 분개 한 니콜은 엄마가 살고 있는 LA 가서 일자릴 구하고 이혼을 요구하게 된다.


장점을 말하자면, 둘 다 세상에 이런 선남선녀가 없다. 물론 약간의 결함은 있지만, 세상에 그런 결함도 없으면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각자 원하고 이루고 싶은 자기 자신이 있고 어느 누군가의 지속적인 희생의 바탕 하에서만 그게 가능하고 어느 누군가가 더 이상 나를 희생하고 싶지 않다고 들고일어나기 시작하면 그 세계의 질서는 깨어지기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적 약자가 대등한 관계로 일어 서기까지 항상 이런 불만과 파국은 있어왔다. 이전엔 살과 피가 튀는 무시무시한 투쟁이나 전쟁을 통해 그 관계가 재정립되었다면, 이제 가장 기초적인 관계의 한 단위인 가정에서 그런 관계 재정립이 일어나고 있고, 특히나 미국 뉴욕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대세라고 본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반면 그런 대가를 통해 톡톡히 목돈을 챙기는 직업군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엘리트라는 비싼 모자를 사서 쓰고 둘 사이를 민첩하게 갈라놓고 사람들의 고통을 휘젓고 각자가 모든 것을 매우 이기적이고 적대적으로 분할하도록 부추기고 승리를 위해 물불을 안 가린다. 그러는 가운데 이혼 당사자들은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파산에 이르고 피를 철철 흘리게 된다. 결국 찰리는 양보하지 않은 대가를 엄청나게 치르고도 양보를 통해 얻는 수준의 것을 얻는데 그건 자신이 자신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능력에 대한 벌같이 보인다. 바로 아내와 아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뭔지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만 했어도 잃지 않았을 대가인데 끝까지 자기 손에 든 것을 놓지 않으려다가 벼랑으로 떨어진 경우이기 때문이다. 이미 그들 사이의 거리는 뉴욕과 LA 만큼이나 멀어져 이해라는 겹치는 부분이 사라진 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마무리될 즈음 찰리는 영화 도입부에 아름답게 내러티브 된 상대방의 장점이 작성된 글을 우연히 읽게 되고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제야 진심으로 후회하고 오열을 터트린다. 자신이 조금만 더 열린 마음으로 니콜을 이해해 주고 양보를 했다면 지금 두 사람은 더 다양한 경험을 하며 매우 자랑스럽게 성장한 니콜을 축하하며 함께 파티를 하고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니, 전쟁을 하지 말고 이해나 양보를 해야 하지만, 그러면 우리가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인간은 서서히 보고 배우며 성장하지 한꺼번에 훌쩍 성장하는 예는 극히 드물다.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한 차원 뛰어넘는 성장을 위해서는 딱딱하게 굳은 껍질을 뚫고 나오는 아픔과 고통이 불가피하다. 딱딱하게 굳은 자기 합리화와 자기 성장의 몸부림은 안팎으로 자신을 압박하기 때문에 살기 위해 서로를 몰아붙이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도 그런 감정과 감정의 부딪힘을 잘 표현한다. 너무도 깊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기대감과 야속함 또한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아마 부모 둘과 함께 살지 못하고 그들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뜻하지 않은 아픔을 겪어야 했던 아들 헨리는 조금은 더 나은 어른이 되지 않을까 싶다만... 지금 세태를 보면 아예 그런 관계 형성 자체를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것으로 보여 안타깝다. 과연 결혼, 그 관계는 인간들에게서 생존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 마음이 씁쓸해지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후다닥 글을 써 올린다.


#노아_바움백, #애덤_드라이버, #스칼렛_요한슨, #결혼이야기, #로라_

















작가의 이전글 소년 시절 Boyhood, J.M. 쿳시/Coetze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