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바뀌는 생각의 결

<데이비드 린치>

by 서영수

"당신이 사랑에 빠질 어떤 생각을 붙잡는 날, 그것이 비록 아주 작은 생각일지라도, 그날은 아름다운 날이다.(The day you catch an idea that you fall in love with, even a small one, is a beautiful day.)"


독창적인 영화 세계로 컬트적 지지를 받아온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1946–2025)가 한 말입니다.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 한동안 곱씹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 하나가 내 하루를 바꿀 수 있다면, 그 하루가 삶의 방향까지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생각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주지 않습니다. 오늘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지만, 불쑥 떠오르는 것은 대개 제가 선택하지 않은 생각들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나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아무 예고 없이 스며듭니다. 분명 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어쩐지 제 것이 아닌 듯 멀게 느껴집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내려 할수록 오히려 그 생각이 더 또렷해지는 경험도 여러 번 했습니다. 잊으려 애쓸수록 더 선명해지는 기억처럼, 생각 역시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 번 붙들리면 오래 머물고, 그동안 그 생각에 빠져 지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생각을 그대로 흘려보내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린치의 말처럼, 우리가 붙잡는 생각 하나가 하루의 빛깔을 바꾸고, 그 하루들이 모여 삶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제는 '좋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막연한 다짐보다는, 어떤 환경 속에 저를 두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책을 읽으며 휴대폰이나 pc를 통해 무엇을 자주 들여다보는지, 그런 사소한 선택들이 생각의 방향과 결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자극적인 글과 빠르게 소비되는 영상들 속에 오래 머뭅니다. 분노와 편향적인 사고를 부추기는 정체 불명의 기사와 끊임없이 바뀌는 화면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도 어느새 그 속도와 내용을 닮아갑니다. 점점 비슷한 정보만 찾게 되고, 그에 따라 비슷한 감정이 반복되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생각에도 습관이 있다는 말을, 뒤늦게 실감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 자신에게 조용히 묻게 됩니다. 오늘 나는 어떤 생각을 붙잡고 하루를 시작할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빛이나 우연히 들은 한 곡의 음악, 마음을 환하게 만드는 맑은 문장 같은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고. 그런 것들을 통해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 하루는 조금은 다른 빛을 띠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생각만으로 곧바로 삶이 바뀐다고 단정하진 못하겠습니다. 다만 어떤 생각을 자주 붙들고 있는지에 따라 표정과 말투, 하루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사실만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생각을 완전히 지배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을 자주 바라볼 것인지는 어쩌면 제 손에 남아 있는 선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제 삶에는 아직 작은 여지가 남아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아주 작지만 맑고 밝은 생각 하나에 잠시 붙들릴 수 있다면, 그날은 어쩌면 충분히 아름다운 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날들이 쌓인다면, 제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제 삶의 결도 달라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 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조용히 무너지는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