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야 할 일은 잊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쉽게 잊힌다. 이런 모순이 또 있을까. 이제 그만 잊어야지 마음먹어도, 그 마음 때문에 더 또렷해지는 기억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괴롭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인생이고, 나의 한계인 것을.
요며칠,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런저런 생각이 이어지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그런 때, 생각이 생각을 부르다 보면 결국 잠들기 어려워진다.
그럴 때면 억지로 생각을 멈추려 하기보다, 잠시 다른 감각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 밤의 적막이 감도는 창밖을 바라보거나, 눈을 감고 조용한 음악을 듣거나,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꺼내서 읽어보는, 즉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천천히 시도해 보는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 순간, 복잡했던 생각도 조금씩 흩어진다.
그러던 어제, 김연수 작가의 산문집 『소설가의 일』을 꺼내서 이 구절을 읽었다.
“앞으로 봄이 되면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특정한 꽃을 보러 다니고, 잊지 못할 음식을 먹고, 그날의 날씨와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 놓으세요. 우리 인생은 그런 것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언어로는 다 전달되지 않는 감정이 분명히 있다. ‘봄이다. 좋다. 아름답다.’ 이런 막연한 말로는 봄을 다 표현할 수 없고, 기억에도 오래 남지 않는다. 말하는 순간 허무하게 사라질 뿐이다.
대신 구체적인 장면은 오래 남는다. 어떤 길을 걸었는지, 어떤 냄새가 났는지, 어떤 소리가 들렸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그리고 그 순간 누가 곁에 있었는지. 그런 것들이 기억을 오래 붙잡아 둔다. 더 오래 남기고 싶다면, 그 장면을 글로 적어두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일기든, 짧은 기록이든. 글의 완성도는 중요하지 않다. 잘 쓰는 것보다 남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록은 결국 삶을 붙잡아 두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에 대해 말하려 할 때,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하려 들기보다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는 편이 더 정확하다. 같이 걸었던 길, 함께 먹었던 음식, 같이 보았던 장면들. 언젠가 다시 그 길을 걷고 그 음식을 먹게 될 때, 그 순간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런 구체적인 기억들이 결국 사랑했던 순간을 더 또렷하게 만든다.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혼자여도 충분하다. 저녁 무렵, 사람이 많지 않은 가로등이 켜진 길을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좋다. 집 근처라도 괜찮다. 막 피기 시작한 꽃을 한참 바라보거나, 아직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걷거나. 그런 사소한 경험들이 쌓여 이 계절을 기억하게 만든다.
어젯밤, 잠시 밖에 나갔다. 아직은 서늘한 밤공기,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조용한 길, 가로등 아래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들. 무겁게 시작한 발걸음이 집에 돌아올 무렵에는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지금의 봄이 또 하나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글로 남겼으니, 그 순간은 조금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