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겪은 전쟁과 긴급한 과제

by 신윤수

10월 1일은 국군의 날이다. 1950년 10월 1일 한국군이 남침한 북한 공산군을 반격한 끝에 38선을 돌파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올해 행사가 계룡대에서 열린다 하니 가볼 수 없어, 우리 근세사에서 겪은 전쟁들과 우리에게 급한 과제가 무언지 생각해 보려 한다.


전쟁(戰爭)과 전장(戰場), 우리 근세사


이언 모리스는『전쟁의 역설』(지식의 날개, 2015)에서 인류가 석기시대에는 10~20%가 다른 사람의 손에 죽었지만 20세기 전체를 따져보니 1~2%만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죽었고, 사망확률이 90%나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더 크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방법이 전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인류가 찾아낸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10~12쪽) 그는 또 ‘전쟁은 차악(次惡)’라고까지 말한다. (16쪽)


우리도 근세사에서 수많은 사건과 전쟁을 겪었다. 내가 여기에 적어보는 것만도 우리끼리 싸운 것(이걸 ‘우리의 싸움’이라고 하자, 이건 적어도 전쟁은 아니다), 우리가 남과 싸운 것(이걸 ‘남과의 전쟁’이라고 하자)과 우리를 두고 남들이 싸운 것(이걸 ‘그들의 전쟁’이라고 하자)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싸움’은 그 자체보다 ‘우리의 싸움’이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문제가 크다.


한편 ‘남과의 전쟁’은 우리가 일으킨 것은 아닌데 외면상으로는 우리가 이겨서 나중에 더 큰 부작용이 생겼다. 여기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있다.


그런데 ‘그들의 전쟁’에는 우리는 전쟁의 주연도 조연도 아니었고 심지어 싸우는지조차 몰랐다가, 우리가 전쟁의 노리갯감이 되었다. ‘그들의 전쟁’에서 그들은 우리 땅, 우리 바다에서 전쟁을 했고, 우리는 그들에게 전장(戰場, battlefield)을 내주고, 그 결과에 우리가 희생을 당했다.


차례로 살펴보자.


1. 우리 내부의 싸움(당쟁)


조선은 1392년에 건국되고 나서 성리학과 소중화(小中華) 의식에 빠져 문약해졌다. 무얼 그리 싸울 게 많았는지 건국 후 200년 동안 각종 사화와 당쟁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일본이 전국(戰國)시대를 거친 후 소란을 밖으로 돌리려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길을 빌리자’고 요구한다. 이로서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이 났다.


한편, 명에서 청나라로 바뀌어가는 정세에서 조선의 친명(親明)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대해, 명나라 대신 청나라를 섬기라는 요구에 따라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겪었다.


각종 예송(禮訟)과 붕당정치를 하다가 영정조대에서 탕평책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1800년 정조가 죽으면서 파란 많은 19세기를 맞이하였다.


조선 역사책에는 누가 어떤 주장을 하다 귀양 가고 죽고 역적이 되고, 반정(反正), 즉 쿠데타가 있었다는 내용으로 그득하다. 잘 모르겠다. 원래 역사란 싸움의 기록이고 알려진 역사는 승자(勝者)가 쓰는 것이니 쓰인 역사에도 많은 역사조작이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19세기 들면서 동학(東學)과 서학(西學)이 문제였다고 한다. 어디서는 동학을 전쟁 즉 난(亂)이라고 하고, 어디서는 운동(運動)이라고 하니 이것도 <역사 바로 세우기>의 과제인 듯싶다. 어쨌든 동학으로 인해 1894년 청일전쟁에 빌미를 준 것은 분명하다.


2. 남과의 전쟁(병인·신미양요)


1866년 병인년 대원군은 국내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신부 베르뇌(Berneux) 등 9명의 신부를 사형시키고, 홍봉주, 남종삼 등 무려 8천여 명을 학살하는 병인박해를 자행했다. 이때 체포를 모면한 리델(Ridel) 신부가 천진으로 탈출해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로즈는 7척의 함대를 이끌고 강화읍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그해 10월 양헌수의 조선군에게 정족산성에서 패한 끝에 물러났다. 이게 병인양요(丙寅洋擾)다.


1871년 신미년 4월 대동강에서 미국 상선 제너널셔먼호가 평양 관민들에게 소각되었다. 당시 평안감사가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다. 미국 공사 로우(Low)와 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저스(Rodgers)가 이끄는 미국 군함 5척이 강화도를 공격했다. 어재연의 강화수비대 600여 명이 맞섰지만 미군이 불과 3명이 전사했는데 조선군은 350여명이 죽었다. 그러나 미군이 전투를 중지하고 돌아가면서 외형상 조선의 승리로 끝난 게 신미양요(辛未洋擾)다.


당시 조선은 두 사건을 양요(洋擾)라며 서양 오랑캐의 소동으로 정의했고,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쇄국양이(鎖國洋夷)의 정책을 계속했다. 만일 이때 조선이 프랑스나 미국에 확실히 졌다면, 그 결과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했다면 그 후 우리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에서, 일본은 1864년 영국 등 4국 함대의 시모노세키 공격에서 졌다).


청나라는 1840년 아편전쟁을 벌인 결과 난징조약(1842년)에서,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Perry)의 개항 요구와 1854년 화친(和親) 조약으로 서양과 만나 개국하였다.


조선은 1866년 프랑스, 1871년 미국과 싸워 외면상 이겼다고 치부하여 나라를 꼭꼭 닫았다가 일본에게 1875년 운양호사건을 겪고 그 결과 강화도조약(1876년)으로 개국하게 된다.


동아시아 3국의 운명은 그랬다. 먼저 개국한 일본은 서양을 흉내 낸 제국주의 국가가 되고, 서양에 의해 억지로 개국된 중국은 반(半) 식민지가 된다. 그런데 바로 이웃나라 일본이 서양의 제국주의에서 몹쓸질을 배워 늦게 개국된 조선(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여기서 보듯이 집권자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알게 된다.


3. 그들의 전쟁(청일·러일전쟁)


조선(대한제국)을 둘러싸고 1894년 청일전쟁, 10년 후인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은 원래 우리와 관계가 없는 다른 나라들의 전쟁인데, 남들이 우리 땅 우리 바다에서 싸우고 나서 우리를 전리품으로 삼았다. 두 전쟁을 소개한 글을 적는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계획적인 도발에 의해 발발되었다. 청일 양국이 조선에 파병하게 되는 계기는 동학농민봉기가 나면서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출병 요청을 하였고 이에 맞춰 일본도 군대를 보낸 데서 시작된다. 이런 청나라와 일본의 동향을 보고 동학농민군이 조선정부와 타협해 내분(內紛)은 수습되었지만 일본군은 철수하려 하지 않았다.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은 조선의 왕궁을 점령했다. 그리고 7월 25일 인천 근처의 풍도 앞바다에서 선전포고도 없이 청나라와 교전(交戰)에 들어갔다. 청일전쟁은 1895년 5월 8일 강화조약이 비준됨에 따라 종료되었으며, 양국 간에 있었던 최초의 근대적인 전면전이었다.(『근현대 한일관계와 국제사회』 강상규·김세걸, 방송대출판부, 2013, 116쪽)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정한(조선정벌)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 작업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러시아 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1904년 2월 8일 인천항과 여순항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군함 각 2척을 선제 기습 공격하여 격침시키고, 이틀 후인 2월 10일에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여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일제는 이와 동시에 대규모의 일본군을 한국정부의 동의도 없이 한반도에 상륙시키고, 서울에 침입하여 대한제국의 수도 서울을 군사적으로 점령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상태에서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조인케 하였다.(『신용하 교수의 독도 이야기』, 신용하, 살림, 2012)


전쟁의 결과다. 청일전쟁 후 1895년 4월 체결된 시모노세키(下關)조약 제1조는 당사국 간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은 조선의 독립을 확인하고 조공전례를 폐지한다”고 규정한다. 러시아와 싸운 일본은 1905년 2월 독도(獨島)를 슬그머니 다케시마(죽도,竹島)라며 슬그머니 시마네현에 편입시킨다. 러일전쟁 후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사할린 북부 절반을 러시아에 떼주고 러시아의 랴오둥반도 조차권을 차지한다.


* 위 부분은 2021년 발간한『푸른 정치와 시민기본소득』 131~139쪽의 내용을 고쳐 실었다.



6·25전쟁에 대하여

1950년~1953년의 6·25전쟁은 한국전쟁이나 6·25동란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는 상태이므로 지금 평가하는 건 이른지 모르겠다. 이에 대한 객관적 기술을 위해 수십 명 집단지성이 공동으로 저술했다는『시민의 한국사 2』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돌베개, 2022)의「6·25 전쟁과 분단의 고착」(359~370쪽)에서 주요 부분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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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 직전 한반도는 냉전체제의 한가운데 있었다. 남북에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정부가 각각 수립되면서 긴장이 고조됐다. 1947년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 발표 이후 냉전이 본격화됐고, 1949년 중국의 공산화, 일본의 재강화 등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양극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359쪽)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적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북한군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7월 20일에는 대전까지 내려갔으며, 7월말에 낙동강까지 진출했다.(362쪽)


6·25전쟁은 큰 인명피해를 낳았다.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는 남북한 합쳐 30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납북 및 월북자 30만여 명, 월남자는 45만~100만 명으로 민족 대이산과 가족 해체가 발생했다.(367쪽)


6·25전쟁은 국제적으로 냉전체제를 확립시키는 계기가 됐다. 국내에서는 남북 간 적대적 대립구조가 확립되고, 전쟁이 끝난 후 각 집권 세력의 권력이 더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368쪽)


6·25전쟁은 남북 간 내전에서 출발해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실제로 전쟁 수행 과정에서 남북은 아무런 결정권을 갖지 못했다. 전쟁은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됐지만, 그 과정에서 소련과 중국이 결정적 영향력을 발휘했다.---중국군 참전 이후 공산군의 전투를 주도한 것은 중국이었다. 북한군은 연합사령관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조중연합사령부 지휘 아래 전쟁을 수행했다. 한국군 역시 대전 서한으로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긴 후 유엔군 지휘 아래 전쟁을 치렀다------휴전협상에서도 남북한에게는 결정권은 거의 없었다. ---미국과 중국은 전쟁과 휴전회담을 주도한 결과 자신들의 의도대로 정전협정까지 체결했다. (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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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긴급한 과제


우리는 지금도 남과 북이 대치중이다.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우리는 그들의 막무가내에 속을 끓이고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유엔군 사령관 자격인 미국이고 우리는 정전협정에 서명조차 하지 못했다. 반면 북한과 중국은 당사자로 되어 있다.


지난 정부의 남북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서 있었던 북한의 태도가 핵무기를 공고화하는 위장 평화라는 의심이 들지만, 트럼프와의 2차례 회담 등 북한도 무언가 다른 걸 모색하려던 시도가 있었다고 본다. 이 무렵 한국전쟁 종전문제에 대해 중국은 동의했는데 미국은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핵무기? 미국의 진심은?


이래저래 나는 우리의 당면 과제를 1. 미 의회의 ‘한반도 평화 법안’을 적극 지지하자 2. 노(No)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자 3. 북한과 미국을 평화 협상 테이블로 유도하자 4. 국방력 강화는 우리 생존의 기초 등 4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려 한다.


1. 미 의회의 ‘한반도 평화법안’을 적극 지지


6월 15일 KBS보도에 의하면 미 하원에서 발의된 ‘한반도 평화법안’에 지지 서명한 연방 의원이 전체 하원수(435명)의 10분의 1에 육박하는 40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이 법안에는 한국전쟁 종전 선언, 평화협정 체결,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근본적으로 남북 평화체제가 우리 문제인데 왜 우리는 미국에 의존해야 할까. 미국은 그들의 국익에 맞게 행동할 게 뻔하지, 우리를 특별 취급하지는 않는다. 지금 전기차 보조금 등에서 보듯이 그들이 우리를 특별 취급해줄까?


한국전쟁 6개월 전인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은 태평양의 미국 방위선을 알류산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정한다고 발표하였다. 미국은 이 방위선 밖의 한국과 대만의 안보에는 미국이 직접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것이 ‘애치슨 선언’이고, 북한과 소련에 잘못된 신호를 주었다는 분석이 많다.


현재 미국 의회에 한반도 평화에 대한 법안이 상정되어 있는지조차 모르는 국민이 대부분으로 보인다. 북한에 대비한 한미 합동 군사훈련은 크게 보도하고, 우리에게 그만큼 중요한 평화 추진 노력은 제대로 알리지 않는 것에는 문제가 크다. 우리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원하지 않는가.


2. 노(No)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자


우리는 세계 경제력 10위, 국방력 6위의 나라가 되었다. 북한의 핵무기라는 변수가 있지만, 재래식 전력으로는 우리가 북한에 월등하다. 만일 북한의 태도가 계속되면 자위권 차원에서 우리도 핵무기를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 관련 인프라를 늘 갖추어 놓아야 한다.


우리는 평화체제 또는 평화통일을 바라지, 이념적으로 북한과 전쟁할 이유가 있거나, 중국·러시아와 북한이 팀을 이루고, 우리와 미국 일본이 팀을 이루어 전쟁을 벌일 이유가 있나? 우리를 둘러싼 나라들은 자기들 영토에서 싸우지 않고, 한반도를 그들의 실전 훈련장이나 무기 시험장으로 만들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만일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고, 주한미군이 그쪽에 투입되거나 우리에게 지원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미국이 아닌 대만이 포함되는가? 우리는 여기에 대해 단호히 거부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중국과 싸울 이유가 없고, 뒤에 써 두었듯이 우리 헌법에서는 침략적 전쟁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중국도 1950년 한국전쟁에서의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버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자. 올초에 시작된 전쟁은 여태껏 주위 여러 나라가 무기를 공여하고 전쟁 물자를 제공하는 국제전이 되어 있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자기들의 재고나 신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고, 우크라이나 전역이 전장(戰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세계 곡창지대였던 곳에 대해 러시아는 핵무기 사용까지 으르고 있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 전쟁을 거부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1950년에 유엔군에 부여한 전시 작전통제권도 빨리 회수해야 한다.


3. 북한과 미국을 평화협상 테이블로 유도


북한은 우리 국력의 2%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예전에 핵 보유국이던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하고 나니, 러시아가 침공했다는 걸 아는 북한이 순순히 핵무기를 내려놓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북한에게 핵무기부터 포기하라고 하지만, 그들이 거부할 텐데, 이같이 서로의 입장이 뻔히 보이는데 누군가 중재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나서서 북한과 미국을 평화 협상 테이블로 인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일이기도 하다.


북한에게는 남한이 북한을 공격할 이유가 없는 점을 설득하고(정 말을 듣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 미국에도 남북간 평화체제 또는 남북통일이 동아시아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 미국에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설득하자. 동아시아의 군비경쟁이 기후변화에도 악역향을 미친다는 점도 널리 알리자.


4. 국방력 강화는 우리 생존의 기초


우리를 둘러싼 일본, 중국은 전에 우리를 침략한 적이 있는 가상 적국(敵國)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인구가 몇 배 많고 국방력도 더 세다. 우리가 앞으로 남북간에 평화체제나 통일을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위협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 이율곡의 ‘10만 양병 주장’이나 임란 후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의 교훈을 잊지 말자.

지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북유럽, 독일과 폴란드 등에서 최신무기 보강과 모병제에서 징병제 전환, 여성징병제 도입 등 여러 형태의 국방력 강화 조치가 추진되고 있다.


우리는 병역자원이 급격히 부족해지면서, 현역 50만명 수준을 유지하려면 남성 자원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여성 자원의 보강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이제 과거처럼 체력만으로 싸우는 시대가 아닌 만큼 여성도 징병하도록 병역법부터 고치자. 지난 8월 17일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 여성징병제에 관한 토론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제 입법권을 가진 국회가 전향적으로 나서야 할 시점이다.


병역법 제3조(병역의무) ① 대한민국 국민(남성과 여성)은 대한민국헌법과 이 법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병역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

←(여성은 지원에 의하여 현역 및 예비역으로만 복무할 수 있다)에서 이 단서를 없애자.


이미 북한, 이스라엘 뿐 아니라 북유럽(노르웨이, 스웨덴 등)에서는 여성도 전투병으로 복무하고 있다.


우리의 생명선인 무역로 보호를 위하여 해군, 해병대를 증강해야 한다. 중형 항공모함과 핵추진 잠수함 건조, KF21의 스텔스화와 해군기(KF21 Navy) 개발 등 예산이 많이 드는 국책 사업을 적극 추진하자. 여기 소요되는 예산은 의무병사 월급을 200만원까지 올리려던 재원으로 충당하자. 의식주 등 기초생활이 보장되는 군에서 최저임금의 절반을 넘는 100만원 정도면 상당한 보수라고 생각한다.


전에는 국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방위성금으로 F4D 팬텀기 등 무기를 사서 전력(戰力) 보강에 사용한 적이 있었다. 지금 18개월 군복무를 하는 장병들을 더 잘 대우하지 못하는 것은 안스럽지만, 여성징병제가 도입되면 남성 입장에서도 그리 억울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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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와 대한민국의 역할


우리나라 헌법은 ‘대한민국은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우리의 다짐을 널리 알려야 한다. 남북의 평화체제 또는 남북통일이 동아시아의 평화로, 세계평화로 나아가는 기본임을 세계만방에 알리자. 우리가 세계평화의 선도자가 되자는 것이다.


헌법 전문(前文)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1987년 10월 29일


헌법 제5조 (침략적 전쟁의 부인, 국군의 사명, 정치적 중립성)

①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②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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