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기대가 실망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런 생각이 벌컥 들었다. 시원하게 냉수 한 컵 들이켠 것처럼 냉수 먹고 속을 차려야 하나? 이런 생각이 물밀듯 찾아왔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제3의 가상인물에게도 그런 순간은 찾아올 수 있다. 물론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쓰는 것은 아니라고 입으로 말 하지만 머리는 그렇지 않다. 이성은 그 길로 가면 안 된다고 말하지만 감성은 이미 그 길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고 있다. 걷잡을 수 없이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가면 헤어 나올 길이 없다. 비집고 나올 틈이 보이지 않는다. 아예 그 속에 침잠하고 만다. 그런 때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한동안 산문은 쓰지 않았다. 일부러 멀리 했다.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내가 언제부터 이 글을 썼다고 흥, 너하곤 다시 볼 일 없을 거다. 삐진 아이처럼 흥, 칫, 뿡이다. 이렇게 치부했다. 그렇다고 글을 아예 안 쓴 것은 아니다. 여전히 시집도 읽고 동시집도 읽고 블로그 활동도 했다. 단지 이곳에만 글을 쓰지 않았던 것뿐이다. 무언가 끄적이지 않는 삶은 나의 삶이 아니다. 시든 동시든 산문이든 말이다. 가끔씩 브런치에서 보내오는 무언의 메시지를 받는다.
"작가님 글이 보고 싶습니다. 무려 60일 동안 못 보았네요 ㅠ ㅠ" "돌연 작가님이 사라졌습니다. ㅠㅠ 기다리고 있는 독자들에게 작가 임의 새 글 알림을 보내주시겠어요?" 이런 안내성 멘트들이 가끔씩 도착하곤 했지만 그래도 쓰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서는 아니지만 컴퓨터를 켜고 다른 일은 했지만 이곳엔 들르지 않았다. 나에 대한 실망이 점점 커지는 순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잘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잘 되지 않을 때 특히 그렇다. 막연한 기대, 브런치에서 그런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산문은 써본 적 없다. 그러니 잘 쓰지 못한다. 브런치를 기회로 산문집을 빌려 읽었다. 기회는 아주 좋았다. 브런치가 아니었으면 산문집을 일부러 찾아 읽진 않았을 것이다. 시처럼 맑고 정갈한 산문집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쓸까? 정말 부러웠다. 누군가 말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산문집을 읽을 때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이런 생각도 물론 들었지만 부럽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필력이 그들의 자산이었을 것이다. 어떤 글이든 많이 써본 사람은 티가 난다. 필력에서 느껴지는 자신감이 있다. 그런 자격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그 아무에게 나가 나이길 바랬다. 욕심이었다. 엄청난 실수였다.
이 글을 쓰면서 컴퓨터가 다운됐다. 평소에 컴퓨터가 다운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곳에 글을 쓰지 말라는 신호인가? 천우신조? 이런 말을 여기에 써도 될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억지로 갖다 붙인다. 하하하, 호탕하게 한바탕 웃는다.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쓴다기보다 자기 자신의 위안을 빌미로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떤 부류일까? 무엇 때문에 글을 쓰고 있나? 오늘 하루 고민해 볼 일이다. 계절을 밀어내는 비를 맞으며, 계절을 밀고 오는 비를 맞으며, 오늘 하루 종일 내내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