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토리오 와인 에어레이터
같은 미술과 부장님과 함께 교과 수업 연구를 하던 날이었다. 커피에 대한 지식이 깊으신 고경력의 전 부장님은 핸드 드립으로 내린 커피를 내 몫까지 가져오셨다. 전 부장님은 항상 집에서 커피를 분쇄해온 후 아침마다 교무실에서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주시는 분이다. 같은 교무실을 쓴 적은 없지만 종종 전 부장님 덕에 맛있는 핸드드립 커피를 학교에서 먹을 수 있었다. 커피 원두만 보고도 어떤 맛인지 아시고, 원두 향만 맡아도 어떤 향인지 아시는 게 늘 신기해서 내가 방학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게 만드신 계기가 된 분이기도 하다. 그날은 운 좋게 전 부장님이 내려주신 드립 커피를 마시며 넓은 미술실에서 단 둘이 우드 카빙을 하고 있었다. 우드 카빙이란 나무를 깎아 숟가락, 젓가락 등을 만드는 공예인데 목장갑을 끼고 날카로운 칼로 나무를 조각하는 일은 많은 집중력을 요구한다. 서로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숟가락과 나무젓가락을 깎았다. 한 분야의 오래된 경력직 사람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건 역시 깊은 내공이다. 그날도 전 부장님은 나는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까지 생각하시며 숟가락을 조각하셨다. 내가 전 부장님의 숟가락을 요리조리 보며 신기해하고 있을 때 전 부장님께서 입을 여셨다. 요즘 아마존에서 판매 1위 상품이 와인 에어레이터라고 말이다. 전 부장님은 동료 교사들에게 내가 와인을 좋아한다는 걸 아름아름 들으셨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커피 좋아하는 사람들이 향을 좋아해 자연스레 와인을 좋아한다며 와인 에어레이터에 대해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해주시기 시작하셨다. 와인 병의 입구에 끼는 도구인데 이 걸 사용하면 공기를 더 많이 만나 와인 맛이 몇 배는 더 좋아진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솔깃해진 나는 그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와인 에어레이터를 검색해보았다. 사실 당시 와인 에어레이터라는 정확한 명칭이 기억나지 않아 와인 에어까지만 썼는데도 바로 연관 검색어에 검색이 되었다. 상세 페이지를 보니 와인 에어레이터를 사용하면 디켄터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디켄터란 투명한 유리그릇을 말한다. 그리고 디켄딩이란 와인을 투명한 유리그릇에 옮겨놓는 일을 이야기한다. 번거롭게 디켄딩을 하는 이유는 포도 껍질과 잔 줄기 등을 사용해 만드는 레드 와인의 경우 찌꺼기가 생길 수 있어 이를 거르기 위해서나 와인과 공기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레드 와인이 공기와 만나게 되면 센 탄닌이 부드러워진다고 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와인을 마시는 주인공들이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는 경우가 있다. 스월링이라 하는데 이러한 행위 역시 와인을 공기와 만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때 마침 남동생이 내 생일이라 가지고 싶은 게 없냐고 물어봐 와인 에어레이터가 가지고 싶다고 했고, 카카오 선물하기에 내가 가지고 싶은 게 있어 곧바로 제품을 받아볼 수 있었다.
마침 그 주에 성당 친구들을 우리 집에 초대했던 쯤이라 와인 에어레이터를 사용해보기로 했다. 내 생일쯤이라 와인 선물들이 들어오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와인샵의 인기 많은 시그니처 와인을 구해놓은 참이기도 했다. 친구들이 오기 전 내가 좋아하는 토마토 홍합 스튜, 바질 페스토 파스타, 부리타 치즈를 만들어 놓고 와인 몇 개는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하였다. 시간이 될 때쯤 친구들이 하나둘씩 오기 시작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와인을 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와인 에어레이터를 꺼내 사용해보자는 제안을 했고 신이 난 우리들은 먼저 와인 에어레이터 없이 와인을 마셔보았다. 그리고 그다음 와인 에어레이터를 사용해 와인을 마셔보았다. 우리 모두 에어레이터를 사용한 와인이 훨씬 맛이 있는 걸 느꼈고 꽤나 신기해했었다. 그리고 덤으로 가장 좋았던 점은 와인을 따를 때 와인의 액체가 병목을 타고 내려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외에도 와인 악세사리를 사는 것은 와인을 마시는 것을 더 즐겁게 해 준다. 바나나 모양의 스토퍼, 비싸진 않더라도 다양한 종류의 와인 잔, 피크닉 전용 플라스틱 와인 잔 세트와 와인 안주를 올려놓을 접시까지. 분위기 내는 걸 좋아하고 소소한 쇼핑하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꽤나 즐거운 취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