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주간 마음이 쉴 날이 없었다. 마음이 구겨지기만 하고 마음을 필 시간이 없어 점점 심보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지내다가는 큰 일 치르겠구나 싶어 어딘가 여행을 가야겠다 싶었다. 어딘가 돌아다니는 여행보다 분위기 좋은 곳에 콕 박혀 있고 싶어 가볼 만한 호텔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호캉스를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기왕 갈 거면 시그니엘이나 조선 팰리스처럼 새로 생긴 곳을 갈까 하던 찰나에 밀레니엄 힐튼이 눈에 들어왔다. 2022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진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그제큐티브 라운지 서비스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이 가격에 이 모든 걸 다 즐길 수 있다니! 물론 시그니엘과 조선 팰리스에 아쉬움이 남았지만 꽤나 가성비 좋게 애프터눈 티, 이브닝 칵테일, 조식을 주는 라운지 서비스에 마음이 기울였다.
호캉스 갈 날만 기대하며 하루하루 버티던 그때, 드디어 호캉스 가는 날짜가 다가왔다. 호텔에 가자마자 짐을 풀고 애프터눈 티 세트를 먹으러 갔다. 원래는 2박 이상 하는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인데 자리가 남으면 1박 하는 손님들에게도 이용할 수 있게 해 준다. 가볍게 쿠키와 아몬드, 카나페 형식의 미니 바게트와 함께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비록 늦게 가서 창가 자리는 앉지 못했지만 어딘가 꼬일 때로 꼬인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단단하다 못해 딴딴해진 마음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시간 정도 책을 읽으며 애프터눈 티를 마시다 방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노곤 노곤해져서인지 처음 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은 1980년대에 개관한 곳이라 옛날 디자인의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촌스럽고 낡았다는 느낌보다는 잘 보존된 고급스러운 미국 감성의 옛 호텔 방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오래된 느낌과 고급스러운 느낌이 공존되어 있어 기분이 오묘했다. 흡사 디자인사 책의 한 페이지에 들어와 있는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 4시쯤에 수영복으로 탈의하고 가운을 입은 채 수영장으로 향했다. 요즘 호텔에서 자주 보이는 인피니티 풀은 아닌 실내에 있는 세로로 긴 수영장이었다. 그리고 옆에는 사우나와 자쿠지가 있었다. 가자마자 자쿠지에 들어가 몸을 녹였다. 그리고 물거품이 나오는 곳에 앉아 피로를 풀다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자유형, 배형 같은 수영을 하기 민망했던 인피니트 풀과 다르게 밀레니엄 힐튼은 어린 시절 배운 수영을 더듬더듬 기억해가며 물장구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함께 간 친구와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수영을 하며 누구의 수영이 더 형편없는지 웃고 떠들어댔다. 서로 예쁜 사진 찍기 바쁜 인피니티 풀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물장구를 치고 사우나에 가고 자쿠지에 수영하기를 반복하다 이브닝 칵테일을 위해 다소 아쉬운 수영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시간 맞춰 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이브닝 칵테일 시작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건만 이미 21층은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다간 남산 뷰가 보이는 소파가 있는 창가 자리는커녕 창가 근처도 못 가겠다 싶어 과감히 17층으로 내려갔다. 예상대로 17층은 줄이 길지 않아 우리가 원하는 창가 소파석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소파가 다른 테이블을 등 지고 있어 우리만 있는 것 같은 데다 남산이 이렇게 가까이 보여 자리에 앉자마자 신이 났다. 평소에 기분이 안 좋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기억조차 안 나고 와인과 보드카들이 즐비한 곳으로 달려갔다. 종류별로 다양한 와인과 보드카를 1시간 30분 동안 맘껏 먹다니! 신이 난 나는 가자마자 QR코드를 찍고 보드카 레시피를 확인했다. 그리고 레시피를 보며 이것저것 제조해보기 시작했다. 진토닉, 블랙 러시안, 캄파리 소다, 쿠바 리브레, 깔루아 밀크, 미모사, 마티니 등 종류별로 만들어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칵테일바에 가면 칵테일 하나당 만원 가까이 되어 종류별로 먹는다는 건 나에겐 아직 사치였는데! 보드카와 함께 먹을 음식들은 가짓수가 엄청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배를 채우지 못할 정도의 가지 수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연어가 정말 맛있었다. 미리 간을 해놨는지 소스 없이 연어만으로 충분히 맛있었고 아무리 많이 먹어도 느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보드카를 마시다 와인으로 눈을 돌렸다. 와인도 가지 수가 꽤 많았다.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스파클링이 2~3개씩 있었다. 한 개에 몇 만 원씩 하는 와인을 이렇게 종류 별로 먹을 수 있다니. 신나서 잔에 이 종류 저 종류를 담아왔다. 그렇게 먹고 마시다 다소 알딸딸해진 상태로 우연히 풍경을 보았다. 내 얼굴이 비치는 유리창 너머로 남산공원과 남산이 보인다. 친구와 이렇게 가까이서 남산 뷰를 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며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여기 온 것 같다며 한참 너스레를 떨었다.
1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다소 아쉬웠던 해피아워가 끝나고 술기운도 깰 겸 남산 공원으로 향했다. 밤 산책하기 좋은 온도였다. 그렇게 조금 올라가다 보면 넓은 평지가 나온다. 넓은 평지를 둘러보다 평지 위에 조금 높게 만들어진 성곽이 보였다. 성곽에 올라가 밀레니엄 힐튼을 바라보는데, 이 호텔이 사라진다는 게 다소 아쉬웠다. 80년대부터 20년대까지 40년을 남산 가까이에 그 자리를 지켜오며 미스 반 데어 로에를 스승으로 둔 한국 건축의 거장이 디자인한 건축물에 이렇게 좋은 뷰와 가격 대비 좋은 시설들을 떠나보내는 게 괜히 혼자 아쉬웠다. 지치고 삐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간 곳에서 큰 위안을 받아서일까 밀레니엄 힐튼을 보는 내내 정든 친구를 떠나보내는 마음을 지우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