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여행은 눈으로 만끽한다. 여행의 멋은 멋진 풍경을 감상하거나 유서 깊은 유적지를 탐방하는 맛이다. 자연이 이룩한 경이로운 지세에 경탄하고 인문이 담긴 유적물을 감상한다.
고된 여행길을 거쳐 마침내 여행지의 멋진 풍경이나 광경을 만나면 환희에 젖는다. 여정의 고단함이 싹 사라진다. 그간의 수고로움이 일거에 보상된다.
자연스레 그곳 주민들의 살아가는 모습들도 본다. 우리의 생활 풍습과 다른 이색적인 풍경을 본다. 그들만의 풍습을 보고, 그곳의 관습을 읽고, 생활 방식을 느껴본다. 그들을 온전히 담고 있는 삶의 양식인 문화를 본다.
여행은 입이 행복해야 한다.
눈과 함께 여행은 입으로 즐긴다. 먹는 즐거움을 뺀 여행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실제 여행에서는 끼니를 때우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맛난 현지 음식을 맛보기 위해여행한다는 말이 제격일지 모른다. 현지의 특색 있는 식재료로 만든 토속 음식들을 음미하며 맛의 향연에 빠져들면 여행은 행복하다.
이스탄불이 그렇다. 여기에서는 눈이 즐겁고 입이 행복하다.그러나 이곳 여행길에는 여타 지역과 달리 이스탄불스러운 여행 감상 방식이 또 있다.
귀로 듣는 여행이다. 보고 맛보는 것과 더불어 듣게 되는 여행이다. 지각의 3차원인 눈, 입, 귀의 감각 기관을 총동원하여 여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스탄불이다.
쉬도 때도 없이 아잔 소리가 도시를 맴돌며 울려 퍼진다. 우리가 선택할 여지는 없다. 보는 관광지는 스스로가 볼지 안 볼지 결정할 수 있다. 맛난 음식도 먹을지 말지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의 종교적 울림은 나의 선택의 재량 범위를 훌쩍 벗어난다. 온종일 걸쳐 귓가에 메아리쳐 울린다.
이스탄불은 지리적으로 동서양이 만나는 길목에 있다. 이스탄불 도시 권역이 보스포루스 만을 사이에 두고 유렵 지역과 아시아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도시 관광을 하다 보면 배를 타고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오간다. 햇살을 받은 뿌연 물안개가 흩뿌려진 푸른 만을 가로지르는 배 위에서 바라보는 내륙 이스탄불의 풍경은 고즈넉스럽다.
곳곳에 우뚝 솟은 모스크들의 장엄한 자태는 종교 도시다운 풍채를 여실히 드러낸다. 높다란 첨탑을 두르고 있는 무슬림의 사원들은 이스탄불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세속적인 욕망이 지배하는 도시 공간에 모스크의 아잔이 수시로 울려 퍼진다. 아잔은 이슬람 예배를 알리는 외침이다. 아잔의 음성은 온종일 간헐적으로 그러나 거침없이 사원으로부터 품어져 나온다.
전통적으로 이슬람 국가에서는 무아딘이란 예배 안내원이 있다. 이들은 매일 기도 시간에 맞춰 예배 알림을 선포하는 메시지를 낭송한다. 예배시간이 임박하면 사원 첨탑 꼭대기에 올라가 육성으로 예배 시간을 알렸다. 세월이 지나 지금은 모스크의 스피커를 통해 아잔이 울려 퍼진다.
아잔의 내용에는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무함마드는 그분의 예언자이시다... 빨리 기도드릴 채비를 하여라’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예배 안내 음성이자 신의 영내로 초청하는 부름이다.
아잔의 외침은 현실의 욕망에 묻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세속의 한가운데에 굳건히 버티고 있는 뭇 인간들에게 성스러움의 세계를 끊임없이 일깨운다. 세상살이의 탐욕에 매몰되어 그냥 외면하고 싶은 성(聖)의 가치와 존재를 주지한다.
바닷 파도가 해안으로 거칠게 밀려오고 담담하게 밀려나가 듯 이스탄불에는 성(聖)과 속(俗)이 끊임없이 시간을 두고 교차한다.
하루 삼시 세끼를 먹다 보면 끼니가 너무 잦다는 느낌이 든다. 먹고 나서 돌아서면 다음 끼니 때다. 소위 하루 일상이 먹다가 볼 일 다 보는 것 같다.
근데 무슬림 신앙에서는 하루 다섯 번의 기도 의무가 있다. 다섯 차례나 아잔의 음성이 애잔하면서도 장렬하게 도시 곳곳으로 울려 퍼진다. 온종일 내내 아잔 음성이 도시를 휘감고 도는 것 같다.
도시 내의 어떠한 은밀한 공간일지라도 아잔의 음성을 피해 숨어 들어갈 수 없다. 아잔의 메아리로 인해 도시 전체가 항상 예배풍의 분위기에 젖어든다.
아잔은 무슬림으로 채색된 아스탄불의 독특한 도시 풍경을 연출하는 주역이다. 아잔이 품고 있는 독특한 종교적인 의미를 우리가 제대로 깨우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추측 건데 아잔의 울림이 난무하는 이 도시 공간에서 인간 개개인이 세속적인 욕망에 심취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표리부동이 만연하거나 권모술수가 득세하기는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물론 이스탄불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혹자들은 익숙지 않은 아잔 소리에 아연실색한다. 처음 이런 생경한 소리를 듣게 되면 몰이해에 우선 짜증스럽다. 귓가를 쨍하게 진동시키는 뜻 모르는 음성들은 소음 같아 거부감 마저 든다.
새 여행지에서 첫발을 뗄 때 감도는 생기 발랄한 표정이 언뜻 그늘지고 미간마저 살짝 일그러진다. 이 조차도 하루 한 번이 아니라 다섯 차례나. 이곳의 종교 풍습도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상적으로 수시로 울리는 종교 메시지인 아잔을 일방적으로 들어야 하니 고충이 이만저만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 이랬던가. 이스탄불에서 여행자의 낯선 하루가 저물고 다시 여행자의 며칠 밤이 지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짜증스러운 기분이 전환되고 마음이 진정된다. 이곳저곳 도시 풍경에 젖어들면서 아잔의 음성에서 공명심을 느낀다. 마음 한편 구석으로부터 평상심이 점차 복원되며 평정심이 찾아온다.
희한하게도 어느 순간 아잔의 음성이 그렇게 아득할 수 없다. 놀라운 자아 변신을 체험한다.
뜻 모를 종교의 메시지가 묘하게 마음을 사로잡는다. 귓가를 찢을 듯 쨍하게 울리는 아잔의 음성이 오히려 마음을 아득하게 감싸 안는다.
어릴 적 시골 작은 예배당 종소리에 마음이 안식을 얻듯. 은은한 교회 종소리에 심정이 감싸 안기며 위로받듯. 가냘프게 작렬하는 아잔 소리가 어느덧 속세에 물든 마음을 다독이고 위로한다.
나아가 아잔에 흠뻑 취하면 세속에 매몰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물욕과 탐심에 빠져있는 자신을 직시하게 된다. 개인주의적 주체가 아니라 이기주의적 아집에 갇혀 있는 자신의 미천함을 발견한다. 관용보다 배타의식에 익숙한 자아의 정체를 또렷히 직감한다.
고맙게도 내 안에 감춰진 세속주의적인 병폐를 포착하는 계기를 아잔의 외침에서 얻는다. 세속의 먼지에 묻혀 잊혔던 성스러움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섬뜻 깨닫게 된다.
늦었음에도 세속성의 성찰은 우리에게 한가닥 삶의 희망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존재의 일깨움을 주는 곳이 어디 있을까. 이스탄불 속살 풍경은 그래서 남다르다. 여행지에서 갖가지 좋은 추억들이 켠켠이 쌓이겠지만 바람처럼 오가는 아잔의 메아리는 강렬하게 회상되는 여행의 기억이자 축북이 된다.
우리는 일상의 쳇바퀴 속에 갇혀 산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왜 사는지 잘 모른다. 심지어 이런 근본 물음을 현실에서 들추어내는 것도 어색하다. 그냥 살아간다. 사노라면 삶 그 자체가 현실이자 목적이 될 뿐이다. 안타깝게도 삶 속에서 추구해야 할 생의 가치를 연마하는 힘을 상실해 버렸다. 더구나 일상성에 젖은 우리에게 성찰을 일깨우는 계기를 접하기 조차 어렵다.
이스탄불의 아잔은 주민들에게 큰 축복이다. 매일 매시간 삶의 의미를 떠올리도록 독려하지 않는가. 세속적인 삶에 온전히 빠져 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존재의 근본적인 가치를 상기시키지 않는가.
믿는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의 종소리에 숙연해지듯이, 불자들이 하염없이 염불 소리를 되뇌며 묵상에 침잠하듯이, 무슬림에게 아잔 소리는 인간의 음성으로 발화되어 심신을 정화시키는 천상의 메시지이다.
이스탄불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귓속으로 메아리치는 아잔 소리에 마음이 동요한다. 이때에 아잔의 음성이 감미롭고 떨림으로 다가온다면 제대로 이스탄불 속으로 몰입했다는 뜻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