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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잎의노래 Jun 12. 2024

영혼을 정화하는 사람들

이스탄불 수피춤


중동에서 ‘춤’하면 밸리 댄스가 먼저 떠오른다.

밸리 댄스는 감각적인 춤이다.

무희들의 현란한 몸놀림은 에로틱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무용수들은 여성적인 신체 부위를 율동 과정에 자극적으로 표출하며 관능을 부추긴다. 복부, 엉덩이, 가슴을 돋보이게 놀리면서 유연하고 매혹적으로 허리를 돌려댄다. 장식을 한 노출이 심한 무대 의상을 입은 무희들의 동작마다 에로틱한 감흥들은 순간순간 지펴진다.    

 

photo by kspo& co


여성들의 곡선적인 신체가 음악 리듬에 맞춰 우아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신이 아닌 이상 육감적인 아름다움에 심취하지 않을 인간은 한명도 없다.          


관능의 미가 발산되는 벨리 댄스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한다.

가장 무의식적인 인간 본성을 깨워 꿈틀거리게 하는 춤이기에 어쩌면 본성에 화답하는 가장 인간적인 무용일 수 있다.     


춤의 기원은 여성들의 다산 의식이다. 고대로부터 사회는 여성들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했다.여성들은 여신을 숭배하고 다산을 빌었다. 다산은 풍요를 상징한다. 자식을 많이 낳는 다산  가축과 곡식의 풍요로움 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다산으로 확대된다.      


밸리 댄스는 여성의 신에게 바치는 춤이다.

여성들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여성 신체 부위들이 강조되어 춤의 율동이 펼쳐진다.  

   

 photo by herabelly naver blog


종교의 엄숙함이 사회를 지배했던 지난 역사에서 리 댄스는 자극적라 해서 경멸과 멸시를 받기도 했다.

관능이 죄악시되고 원초적인 욕망이 금지 당하는 곳에는 인간성이 설 자리가 없다. 인간의 관능적 본능은 억누를 것이 아니라 적절히 발산해야 한다. 억압과 족쇄로 다스릴 것이 아니라 순화하고 아름답게 표출되어야 한다.


본능의 침묵이 강요되는 곳에는 인간의 품성이 무르익거나 발현되기 어렵다. 인조 인간이나 가스라이팅 당한 인간들로 꾸려진 사회를 획책하려고 하지 않는 한 인간 본성은 생애에서 아름답게 구현되어야 하고 순수하게 펼쳐져야 한다.      


들의 우아한 몸놀림에서 육감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무희들은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체감하고 인간의 본능을 잘도 표현하고 있다.     


다행히도 지금은 벨리댄스가 전 세계로 확산되어 유흥으로서, 취미 활동으로서, 신체 운동으로서 지역 특색을 살려 다양하게 변신하며 애호되고 있다.         

            

그러나 이스탄불에는 벨리댄스의 분위기와는 사못 다른 춤의식이 있다. 일종의 종교 의식이자 신앙 의례로서의 춤이다. 작이 변화있고 다채롭게 움직이는 통상 춤의 행태가 아니다. 춤사위가 극히 절제되고 단순하며 몰입되는 춤이다.     



 종교적 전통과 결부되어 전수되 수피춤이 그러하다. 수피춤은 튀르키예의 콘야에서 유래된 종교 의식 춤이다.      


수피파 또는 수피즘(Sufism)이라고 하는 종파는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적 분파이다. 이들은 율법이나 전통적인 교리를 중요시하는 주류 이슬람교 종파와는 다른 신앙적 방법으로 께 다가가고자 한다. 이들의 신앙 생활은 현실주의적 구도 방법을 택한다. 신과 하나되는 방법으로 춤과 노래로 구성된 종교적 의례를 중시한다.     

정통 이슬람에서 강조하는 율법과 교리, 쿠란의 가르침에서 발견할 수 없는 신의 초월성과 사랑은 인간의 진정한 내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수피파는 율법과 교리 중심인 정통 이슬람이 영혼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인 종교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이들은 묵상을 통해 신비주의로 나아간다.     


수피즘의 창시자 메블라나 루미는 신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 마음 속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신앙 생활에서 인간의 내면화를 중시하면서 마음의 변화를 통해 신에게로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탐욕을 멀리하고 금욕주의를 실천하며 마음을 정화한다.     



창시자 루미는 설파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신의 반영(reflection)이다.

수피즘은 결코 지식체계나 상상적인 이상주의가 아니다. 지식, 현실, 사랑, 무아경 속에서 성숙되어 가는 종교이다.’     


이들의 종교 의식은 때론 춤과 노래로 표현되는 데 끊임없는 반복과 집중으로 정신적인 혼미 상태를 넘어 일종의 환각 상태에 도달하기도 한다. 수피춤은 쉬지않고 좁은 공간에서 양손을 활짝 펴고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끊임없이 뱅글뱅글 원형을 그리면서 돈다. 단순 반복적인 춤 행위를 통해 묵언과 무상,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스탄불에서는 시르케지 기차역 내의 홀을 비롯하여 시가지에는 수피춤 전용 공연장들이 있다. 실내 전용 수피춤 공연장에서는 경건한 의식을 위해 관객들의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체의 소란스런 행동도 자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일반 춤 공연장은 시끌법적스러움을 즐긴다. 공연 열기를 지피고 배우와 관객간의 교감을 높이기 위해 관객들의 환호, 갈채와 같은 반응들을 은근히 유도한다. 관객들의 호응은 곧 배우들에 대한 찬사와 격려의 표현이며 공연의 흥을 돋우는 자극제이다. 일반 공연장은 공연내내 연호와 갈채가 쏟아지고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그러나 수피춤 공연장은 정반대이다. 공연장은 공연내내 엄숙함이 감돈다. 공연 자체가 종교적 의례이자 신앙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숨쉬는 것 외에는 정막을 깨는 사소한 행동거지들을 자제해야 한다.   

   


공연이 시작되면 연주단이 조용히 등장한다. 단원이랬자 북, 피리 등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서너명의 단원들이 전부다. 이들은 종교적인 색채가 담긴 담백한 음율을 읊듯이 연주한다.    

 

음악이 조금 무르익을 때 드디어 오늘의 수피춤을 출 주인공들이 차례차례 엄숙히 등장한다. 머리에는 대나무 채로 엮은 목침같은 긴 모자를 쓰고 하얀 옷을 입었다. 윗도리는 품넓은 저고리 형태이고 아도리는 폭이 넓은 큰 치마를 둘렀다. 춤꾼들의 연령은 전통 계승자인 듯 연륜있는 풍채를 풍기는 나이 든 몇 분과 중년 분들로 구성되었다.    

  


이어 의례 음율이 잔잔히 울려퍼지는 가운데 춤사위 꾼들은 서서히 무대를 들어서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춤이란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몸동작의 춤이 아니다. 그저 율동 변화가 없는 극히 단말적이고 단조로운 움직임 뿐이다.     


너댓명의 춤꾼들은 몸동작도 천편일률적이다. 양팔을 하늘을 향해 45도로 펼친다. 머리에는 긴 대나무채로 엮은 길다란 원통형 모자를 쓰고는 고개를 15도 쯤 약간 옆으로 젖힌다. 그리곤 무대 중앙을 중심 축 삼아 주변을 뱅글뱅글 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우리가 똑 같은 춤 행위를 한다면 어지러워 곧 비틀비틀 쓰러지고 말 것 같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들은 춤 자태를 한치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아마도 수많은 반복 수행을 통해 춤 행위가 몸에 완전히 체득된 듯이 보였다.      


단순. 반복, 몰입.

이들은 지속적인 반복 행위를 통해 신비의 경지에 몰입하고자 하는가. 몰입과 심취를 통해 신과의 교감을 모색하고자 하는가. 몰아경의 경지에서 신과 합일하고자 하는가.


신기하게도 이같은 담담하고 무색무취한 춤사위를 숨죽여서 보는 관객들의 마음도 점점 벅찬 가슴으로 춤사위에 빨려 들어간다.     


경이로운 세계로 빠져드는 듯한 야릇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공연장은 내내 침묵이 감돈다. 전통악기로 조합된 음악 연주가들의 선율 만이 잔잔하고 애잔하게 울린다. 너댓명의 공연 춤꾼이자 종교 의례자들의 몸동작은 작은 중앙 무대를 한가득 채워버렸다.     



수피춤 공연장에서 배우와 관객은 열연과 환호로 호응하면서 일체화되는 게 아니다. 묵언 속의 교감이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발산되는 신비주의가 맴도는 공간에서의 공감이다, 똑같은 자세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돌고 도는 춤사위 꾼들의 미세한 동작을 응시하고 몰입하면서 느끼는 일체감이다.  

   

여행에서 얻는 값어치 있는 보람은 새로운 경험이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는 것이고 체험했다는 점이다. 나의 기존 생활권에서 접하지 못했던 낯선 이채로움을 체득해 보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세상에는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새로운 문화의 체험과 학습은 나를 상대화할 수 여력이 된다. 나를 중심에 놓았던 아집의 타당성을 의구심을 가지고 되돌아 보게 한다.     



수피춤을 보고나면 잠깐 종교적 환영 속에 묻힌다. 세속의 복잡다난한 현실을 잠시 이탈한 자신을 발견한다.

이어서 ‘나’ 라는 존재에게 자문한다.


본능적인 인간은 결국 본질적인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Everything in the universe is within you.

Ask all from yourself.’

- Suf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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