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은 주어지고 선택은 요구받고..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by 갈잎의노래

삶이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을 피해갈 수 없다.

내가 선택하든, 선택하지 않든 선택은 이루어진다.


선택의 상황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타자적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형성된 지금의 상황이다. 나의 선택은 현재의 상황에서 이루어지며, 나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다. 선택의 포기 조차 일종의 선택의 한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선택한다. 고로 나는 선택의 결과에 따른 도의적, 양심적, 결과적 책임을 회피할 수 없게 된다. 선택은 나의 온전한 자유 속에서 이루어지기에 책임은 오롯이 나의 몫이 된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삶에서 인간은 본질적인 존재라기 보다는 실존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추상적인 인간 본성을 논하기보다는 지금 여기의 인간을 말해야 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 말은 곧 상황과 유리된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 상황 속에 처해있는 현재의 인간이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현재의 상황과 결부된 인간의 현 모습이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다.


역사적인 존재이자 사회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존재한다. 이러한 사실이 본질적 인간론보다 실존적 인간론이 우리에게 더욱 의미있는 이유이다. 실존주의는 구체적인 이 시대, 체감되는 지금의 순간, 당면한 현실적 상황 속에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직시한다.


예컨대 나의 행복을 논할 때 인간 일반의 행복 조건은 무의미하다. 현재 내게 중요한 것은 지금의 여건 속에서 나의 행복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좋은 집이 있고, 좋은 차가 있고, 돈이 많고, 이런 막연한 일반적인 행복 조건은 나에게 큰 감흥을 주지 않는다. 내가 현 상황에서 갈망하는 행복 조건은 남과 다른 유일한 나의 조건들이다. 가족과 대화의 시간이 많아졌으면, 내가 좋아하는 그 악기를 살 수 있으면, 올해는 휴가때 해외 배낭 여행을 갈 기회가 주어졌으면... 이러한 구체적인 욕구가 지금 상황에서 내 마음에 와닿는 행복의 조건이 된다.

실존적 인간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할 운명에 처한다. 선택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형이상학적인 잣대는 없다. 신들의 시대였던 고대나 중세만 해도 종교적 권위에서 나오는 주술이나, 계율이 인간의 판단과 행동을 결정짓는 주요한 준거가 되었다. 계몽화된 지금 현대의 인간은 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지 않는다. 홀로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매순간 의미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자신이 선택한 그 결과에 대해선 자신이 향유하거나 감내해야 한다. 선택은 개인적인 자유 속에서 자신의 결단이 된다.

인간 개개인은 스스로 미래를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사회적 존재이기에 당연히 실존자로서 개인은 정치적인 사회 상황과 분리될 수 없다. 정치적으로 내가 선택해야 할 구체적인 상황은 늘 도래하고 있으며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된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는 자신이 판단하고 선택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위대하게도 인류 역사에서 투쟁을 통해 통치 대상자였던 국민이 통치자를 제어할 수 있는 민주주의 투표 제도를 창안했다. 투표를 통해 국민이 통치 권력을 선출하고 견제함으로서 이제 통치자는 민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기 어렵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올바른 투표 행위는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고 그릇된 투표 행태는 사회를 퇴보시킬 수 있다. 통치 권력과 관련된 투표의 대원칙은 다음과 같지 않을까.

권력이 잘못하면 권력 교체의 경종을 울린다. 정치를 잘하면 권력 재창출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통치 권력의 잘, 잘못에 따라 권력이 유지될 수도, 바뀔 수도 있다는 시그널을 기존 정치권에 던지는 것이다. 이로서 정치권은 긴장하게 된다. 정치권의 자정 노력과 쇄신을 유도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가치관은 다양하다. 진보로부터 보수까지의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현실 상황과 괴리되어 고착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적 신념 속에는 상황 변화를 읽는 깨어있는 각성이 늘 필요하다. 무조건 ○○지지, 무조건 ○○ 투표와 같이 관찰과 판단이 배제된 맹목적인 ‘묻지마 지지’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면 자의식은 현실에서 왜곡된다. 가치와 신념도 현실성과 괴리되어 설득력을 잃고 공허해진다. 중국의 혁명 지도자 마오쩌둥은 중국 혁명사에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혁명 후 특정 시기에 중국 사회 전반이 비합리성, 폐쇄성에 갇혀 마오쩌둥에 대한 숭배가 극으로 치닫았다. 이 과정에 이른바 마오쩌둥의 ‘무오류성’이 등장하였다. 즉 마오쩌둥의 혁명 교시는 ‘무조건 올바르고 정당하다’는 것이다. ‘무오류성’은 과학적인 혁명 이론이라는 사회주의 이론의 자기 모순이다. 그럼에도 당시 아무도 ‘무오류성’의 ‘오류성’을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않았다. ‘무오류성’의 등장에서 중국 사회 체제에 다가올 커다란 비극은 예고되고 있었다.


진보든 보수든 닫힌 의식이 아니라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폐쇄적인 신념이 아니라 개방적인 안목이 요구된다. 시대는 변동하고 정치적 상황은 변화한다. 따라서 정치적 의제를 해독하는 눈은 변화와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현재 실존은 새로운 통치 권력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 앞에 서있다. 책임있는 선택으로 정치를 발전시킬 수도 있고 무책임한 선택으로 정치를 퇴보시킬 수도 있다. 이 상황에서 자유에 기반한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떳떳히 자인할 수 있을 때 그는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


표지 사진 pexels-markus-spis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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