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말의 갈등’ 에피소드는 이렇게 시작된다. 남자는 방에 들어서자 신었던 양말을 편하게 대충 방 한 구석에 벗어던진다. 아내는 양말을 빨래 바구니에 왜 두지 않느냐고 핀잔을 준다. 남자는 응대한다. 편하게 살자면서 옷이나 양말을 대충 방에 좀 던져두면 안 되냐고. 여자는 맛받아친다. 옷가지는 정돈해서 제자리에 두어야 깔끔하지 않으냐고. 양말에서 시작되어 옷가지, 평소 습성까지 이어지는 논쟁은 끝이 없다.
생활 속에서 남녀 간 갈등은 평소 잠잠해진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에 불쑥 튀어나온다. 사회적으로도 갖은 성차별 해소 정책 마련에도 불구하고 돌발적인 큰 이슈로 불거진다.
남녀 갈등은 왜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까?
남녀 갈등은 남성과 여성의 ‘존재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즉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존재의 차이'란 곧 선천적 차이이다. 여기에 사회 환경적 차이가 가미된 존재 기반이다. 예로 남성은 단순 터프하면서 행동지향적이다. 반면에 여성은 섬세하게 숙고하는 편이다. 남녀 간의 원천적인 성향의 차이는 사물을 바라보는 데서,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삐끗거림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심층 인성에는 남녀 간 ‘존재적 차이’가 각인되어 있다.
‘존재적 차이’로 나타나는 사고와 행동의 이질성은 지구촌 인종 군의 사고방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서양인의 사고 구조는 개인주의적이고 실용적이며 분석적인 경향이 강하다. 이에 반해
동양인의 사고 구조는 관계적이고 추상적이며 통합을 지향한다. 서양인과 동양인 간에 간혹 서로를 낯설어하고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서 나온다. ‘존재적 차이’가 행동 양식, 사고 체계의 차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일로 상대방과 갈등하는 일이 있을 때 역지사지(易地思之)하라는 조언을 듣는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상대를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은 맞는 말이고 한편은 맞지 않다. 마음으로는 역지사지가 좋은 줄 안다. 그러나 행동으로 역지사지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남성과 여성간의 갈등 문제에서는 ‘존재적 차이’로 인해 역지사지가 잘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남성이 여성성을 어떻게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여성이 남성성에 어떻게 잘 공감할 수 있을까. 갈등 사안에서 남성이 여성을 온전히 이해하고, 여성이 남성과 공감할 수 있으면 남녀 갈등은 쉽게 풀어질 수 있다. 하지만 남녀는 육체적 특성, 생리적 조건이 다르다. 물리적으로 남성이 여성이 될 수 없고, 여성이 남성이 될 수 없듯이 남녀간에는 생각과 행동양식, 생활 가치관에 틈새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남녀 간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남녀 간의 갈등을 푸는 출발점이다.
자연의 작동 원리는 자연계의 개체들이 제 나름껏 속성들을 꽃피우는 데에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 식물은 개체 스스로를 활짝 펼쳐 보인다. 곧 다양성의 확대는 자연의 섭리이요, 획일성의 확산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다. 개인은 인간성이라는 보편성과 개성이라는 나름의 특수성을 동시에 지녔다. 인간 개개인이 저마다 다른 특성을 지녔다는 것 자체가 자연계의 다양성을 현시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도 큰 틀에서 마찬가지이다. 인간성 + 남성성, 인간성 + 여성성으로 존재한다. 여성적 개성, 남성적 개성을 모두 아름답게 발현하는 것이 인간성을 더욱 풍요롭게 실현하는 길이다. 개성은 인간의 존엄성을 담보하는 핵심 요소이다.
계급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 회자되었던 ‘남녀유별(男女有別)’ 유교 교시는 오늘날 대표적인 성차별 언어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제 성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사회에서 이 개념을 산뜻하게 재해석 봄직하지 않을까. 차별과 배제의 개념에서 개성과 다양성을 지칭하는 언어로.
혹자는 남성과 여성이 모든 일에서, 행동에서 똑 같은게 남녀평등이라고 말한다. 고유한 성의 특성이 증발해버린 기계적 평등을 완전한 남녀 평등으로 오인하고 있다. 과연 남녀가 모든 방면에서 인위적으로 일체화되어야 남녀 평등일까.
남녀평등으로 나아가는 길은 양성의 행태를 기계적으로 똑같이 재단하는 것에 있지 않다. 역으로 서로의 차이를 들추어내는 데에 있다. 다름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여 ‘차이’의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남녀평등은 전진할 수 있다. 남녀 각각에 담긴 고유한 성향들을 건강하게 가꾸는 것이 인간 사회를 풍부하게 한다. 남성의 특유한 기질들과 여성의 다채로운 성향들이 역동하는 데에서 삶은 더욱 풍요로와 진다. 당연히 여기에는 남성적인 여성 성향도 있을 수 있고, 여성적인 남성 취향도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단 예외적으로 남녀 차이의 심층에 남녀 동일성의 근간이 있다. 남성, 여성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성’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닌 인격체라는 점에서는 양성간에는 한치의 오차나 차이도 없다. 이로서 양성 간의 사고나 행동의 차이가 결코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차이에 따르는 차별은 근거 없는 억압이자 비이성적인 배제이다.
특히 차이가 직업에서, 특정 영역에서 차별로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특정 영역은 일방의 성만이 독점할 수 있다는 인식은 차별의식이다. 양성은 접근이 제한되고 있는 상대 성의 어떤 영역에도 진입할 수 있어야 한다. 양성이 차별 없이 넘나드는 삶의 영역이 확대될수록 그 공간은 진보한다. 양성 모두로부터 품어져나오는 개성 에너지가 시너지를 높일 것이므로. 예컨대 남성 중심의 정치 영역에 여성 정치인이 폭넓게 진입할수록 정치는 변화한다. 여성 특유의 정치 성향이 남성 독점의 경직된 정치 공간에 섬세함과 부드러움, 평화를 퍼뜨릴 수 있기에.
이제 양성의 일방적인 통합을 평등으로 오인하지 말자. 당당하게 차이가 북돋아져야 하고 개성이 칭송되어야 한다. 평등한 인간 존엄성으로 무장한 양성의 차이는 선망스러운 균열로 주시되어야 한다. 양성 간 차이를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자연적인 평등이요, 인간적인 동등이다. 맹목적 동일시가 아닌 주체적인 협력, 공허한 획일화가 아닌 개성적 소통으로 양성은 연대해야 한다. 각각의 고유한 특성들을 만개시키면서 손잡아야 한다. 나는 나답고 너는 너다우면서 '우리다움'을 모색하는 것이 평등이다. 내가 없고 네가 사라진 '우리'는 무의미하다. 이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은 차별의 근거가 아니라 아름다운 차이로 자각되어야 한다.
여성 차별의 시대에 한 여성학자는 여성 차별에 대해 인류사에서 ‘절반의 실패’를 얘기했다. 이제 인간 역사에서 ‘절반의 실패’를 회복하는 것이 나머지 절반의 성공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 ‘실패한 절반’의 가치를 복원하는 일이 하나의 인류를 향한 필수 조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