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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완 Jun 07. 2020

장 폴 고티에

패션계의 악동, 50년간의 발자취

프랑스 태생의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달리 디자이너로서의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피에르 가르뎅에 의해 18세에 패션계에 입문하였다. 

피에르 가르뎅은 1970년 고티에가 보내온 스케치를 보고 그를 조수로 고용하여 약 1년간 피에르에 조수로 일을 하고, 이후 괴짜라 불렸던 자크 에스트렐 밑에서 일을 하다가, 1971년 이탈리아의 디자이너인 안젤로 타를라지와 함께 디자이너 장 파투의 팀으로 합류하게 된다.

1974년 다시 피에르의 곁으로 돌아갔지만 피에르는 고티에를 필리핀으로 보내 미국 시장 개척을 위한 디자인을 그리게 했고, 2년 후인 1976년 처음으로 자신의 컬렉션을 열었지만 그의 첫 번째 라인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실패는 그에게 큰 빚을 남기게 되었다. 장 폴 고티에는 회사를 정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가시야마에서 그에게 '제임스 본드' 라인의 디자인을 부탁하면서 고티에의 디자인이 다시 빛을 보게 된다.

1980년대 내내 ‘프랑스 패션계의 악동 (the enfant terrible of French fashion)’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그가 선보였던 디자인들은 항상 화제가 됐다. 쿠튀르에서 지내온 시간은 재단법과 테크닉을 갈고닦을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 디자이너에게는 전통적인 프랑스 디자인은 상당히 지루하고 심심했다.

1978년 첫 의상컬렉션을 선보인 이후, 고티에는 쿠튀르와 프레타 포르테 여성복, 남성복, 주니어, 향수 등으로 점차 라인을 확장해나갔고, 진, 안경 등 라이선스 사업도 확장해왔다.

피에르 가르뎅이 고티에의 재능을 알아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두 디자이너는 시대는 달랐지만, 관습적인 디자인을 거부하고 재미가 넘치는 컬렉션으로 유명한 전위적 패션의 선구자들이었다. 하지만 피에르 가르뎅의 디자인이 과거와의 단절을 통한 미래주의적인 디자인을 꿈꾸었던 반면, 고티에는 과거의 유산이나 고전적인 디자인을 재료 삼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실제로 고티에 디자인의 대표 명사 격인 코르셋 패션이나 브레통 피셔맨 스웨터를 비롯해 그의 컬렉션에는 기존에 존재했던 것들이 디자이너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 전혀 다른 패션이 된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고티에는 “나는 프랑스보다 영국이 더 편하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런던을 흠모하는 파리지앵이었고, 그것은 그의 디자인에 그대로 나타났다. 

흔히 파리지앵의 이미지는 무심한 듯 고상하고 진중한 말투인데 반해, 고티에의 얼굴에는 늘 감정이 넘쳤고 좋은 것은 최상급 표현을 사용하여 최대한 부풀려서 말했다. 그는 그의 표현을 영국에서만 찾을 수 있는 특이한 유머와 연결시켜 설명했다. 또한 영국인 특유의 유머가 그들의 옷차림에 나타난다고 했다.

고티에는 “영국인들은 자신을 우습게 보이도록 연출하는 반면, 프랑스인들은 언제나 심각하고, 세련되고, 관례에 맞춰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영국인들의 혁신적이며 유연한 성격이 그의 전위적인 패션 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의미했다.

고티에의 디자인은 런던의 펑크룩처럼 파격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과감한 노출과 메이크업, 의외의 무대 연출로 충격을 주지만, 그가 즐겨 사용하는 색채인 아이보리, 새먼 핑크(salmon pink) 등을 살펴보면 고채도의 원색은 피하는 프랑스 문화의 세련됨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앞서 언급했던, 고티에가 기존의 것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 사회적으로 정의된 성 정체성에 대한 재정의 : 여성성

패션 역사가 발레리 스틸은 “장 폴 고티에가 패션계에 남긴 가장 큰 영향은 사회적으로 정의된 여성과 남성 그리고 그에 따른 정체성의 개념을 가지고 디자인을 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고티에는 패션 디자인을 통해 여성/남성이라는 것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시도하거나, 양성 간의 코드를 의도적으로 믹스했다.

대표적으로 마돈나의 원추형 브라를 예로 들 수 있다.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이 의상은 마돈나의 1990년 ‘Blonde Ambition’ 월드 투어를 위해 고티에가 디자인한 것으로, 원추 모양으로 가슴을 강조한 코르셋 형태의 겉옷을 마돈나와 백댄서들이 함께 입었다. 이후에도 이 코르셋 룩과 돌출된 가슴 디자인은 고티에 컬렉션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그가 만든 코르셋은 여성성을 과장되게 표현한 것으로 페미니즘 운동가들에게 억압의 상징이라고 강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적 할머니가 뷔스티에를 입는 것을 도와주면서, 또는 티비에서 봤던, 폴리 베르제르(1869년에 만들어진 파리의 뮤직홀)의 여성 댄서들의 뷔스티에를 떠올리며, 코르셋을 '강한 여성'의 상징으로 해석했다고 한다. 

실제로 19세기 초, 기마병의 자세를 꼿꼿이 세워서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남성들이 코르셋을 입기도 하였는데, 코르셋은 허리를 무조건 조여서 가늘게 만들고자 만든 것이 아니라 적당히 조여 자세 교정과 체형 보정 등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고티에의 코르셋은 속옷을 겉옷으로 입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을 뿐 아니라, ‘여성성=나약함’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강한 여성', '남근 숭배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이러한 성(性)적으로 '강력한 여성'의 이미지는 1980년대부터 대두된 여권의 신장이라는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마돈나와 장 폴 고티에가 함께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2. 사회적으로 정의된 성 정체성에 대한 재정의 : 남성성

고티에는 남성복에서도 혁신적인 디자인을 제시했다. 그는 의상을 만드는 소재에 있어서는 남녀의 구분이 없음에도, 완성된 의상의 일부 품목에 엄격한 성 구별이 있음을 인식했다. 

남성복에서 치마는 스코틀랜드의 킬트나 옛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착용했던 치마 형태의 복식이 있었지만 제한적인 것이 사실이다. 고티에는 미디에서 맥시까지 다양한 길이의 남성용 치마를 런웨이에서 선보였고, 자신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치마를 즐겨 입었다.

고티에의 남성용 스커트는 출시되던 1985년 한 시즌에만 3000벌이 넘게 팔려나갔다. 치마를 입은 남성들은 파리의 식당에서 웨이터의 긴 앞치마를 연상시켰고, 남성을 오히려 더 남성스럽게 연출했다. 스커트는 격식 있는 재킷, 두꺼운 양말이나 부츠와 코디됐으며,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남성성을 입증할 필요가 없는 이성애자들의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고티에가 즐겨 사용하는 레퍼토리 중의 또 하나는, 본인도 즐겨 입었던 브레통 피셔맨 스웨터이다. 지금은 마린 룩이나 노티컬 룩으로 알려진 스타일인데, 고티에는 이 중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 어부들의 스웨터를 재해석했다. 브레통 피셔맨 스웨터는 섹시한 남성을 표현했으며, 여성복, 아동복의 디자인으로도 재해석되었다.

3. 거리 문화를 쿠튀르로 끌어들인 장 폴 고티에

고티에는 자신의 디자인이 원래는 파리의 여인들에게서 영감을 받았으나, 후에 보이 조지 같은 런던 팝 음악과 펑크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거리'는 언제나 첫 번째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며, 기존의 쿠튀리에들이 사용하지 않았던 것들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새로운 것들을 창조했다.

고티에는 어느 날 고양이 밥을 주려고 깡통을 열다가 깡통의 위와 아래 부분을 잘라낸 모습이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넓은 팔찌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고티에는 깡통을 잘라 은도금을 입힌 후 자신의 컬렉션에 사용했다고 한다. 또 비닐, 라텍스, 신축성 있는 튤(망사 소재), 각종 주방 기구와 같은 하이패션에 어울리지 않은 소재들을 창의적으로 사용했다.

고티에는 처음으로 '보통 사람들'을 런웨이에 올린 디자이너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다양한 체형의 여성과 남성, 백발의 노인, 온몸에 문신을 새긴 사람 등 어쩌면 보통보다 더 보통 같은 사람들을 모델로 썼다.

<출처: (cc) HellN at commons.wikimedia.org>

새로운 아름다움을 정의하는 고티에의 도전은 소재나 인물뿐 아니라 디자인의 주제에서도 계속되었다.

펑크룩의 새로운 해석이나 얼굴까지 다 감싸는 바디슈트 위에 옷을 입힌다거나, 피부를 연상시키는 옷 위에 정맥과 동맥을 그린 후 그 위에 옷을 입혀 착시를 일으키거나, 근육과 혈액의 흐름이 다 노출되어 보이게끔 인체의 안과 겉을 뒤집는 디자인 등 성 정체성에의 도전 이외에도 오늘날까지 다양한 디자인을 시도하고 있다.

1994년에는 몽골 등 아시아 지역의 문화를 해석한 에스닉룩을 선보였고, 뤽 베송 감독의 <제5원소>등 공상과학 영화들의 의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고티에의 이런 시도들이 늘 긍정적인 반응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특히 1993년 ‘Chic Rabbis (멋진 랍비들)’이라는 이름의 컬렉션은 큰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다.

고티에는 하시디즘(대단히 엄격한 유대교의 한 형태)적인 전통 의복에 대한 헌정이라고 밝혔지만, '그저 또 하나의 패션의 소재일 뿐 정통성이 결여되었다' 하여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그는 2012년 S/S 쿠튀르 컬렉션을,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한 영국의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에게 헌정했으나 와인하우스를 꼭 닮은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을 한 모델들이 상업적인 쇼에 올라간 것을 본 가족들과 팬들의 유감을 샀다.

패션 역사가 발레리 스틸은 패션의 역사에서 고티에의 기여는 '여성을 인형같이 꾸미는 모더니즘적인 아름다움과 결별하고, 이전의 추하고 속되고 관습에 거스른다고 여겨지던 것들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한 것'이라고 했다.

고티에의 패션은 다양한 재료들로 만드는 어른들의 놀이이며, 그 일상적인 놀이에서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그의 쾌활함은 2011년 몬트리올 예술 박물관(Montreal Museum of Fine Arts)에서의 전시회 개막 전야 행사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몬트리올 거리에서 요정, 캉캉, 힙합 댄서, 모델들과 함께 퍼레이드를 이끌었고, 행인들과 사진을 찍으며 축제 분위기를 만들었다. 구경꾼들에게 선원 모자를 나눠주고, 함께 나온 개들이 그 모자를 쓰고 뛰어다니며, 에펠탑과 콘 브라 모양의 거대 풍선이 떠다니는 광경은 그의 패션 미학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4. 마르지엘라, 에르메스. 장 폴 고티에와의 관계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혁신적인 디자인과 끊임없는 실험을 통한 해체주의 디자인으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마르지엘라는 장 폴 고티에의 제자로서, 고티에는 그의 디자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르지엘라는 고티에의 첫 번째 컬렉션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로부터 9년 뒤, 그는 앤트워프 왕립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장 폴 고티에의 밑에서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3년 간 고티에의 어시스턴트로서 활동을 하고 친구인 제니 메이렌스와 함께 1988년 설립한 브랜드가 바로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이다.

이후 1997년, 마르지엘라는 럭셔리 브랜드 에르메스에게 러브콜을 받아 여성복 디렉터로서 컬렉션을 진행하게 된다. 마르지엘라는 에르메스에서, 그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디올, 알렉산더 맥퀸, 지방시 등의 화려한 디자인과는 대조적인, 편안함과 지속성을 추구하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같은 해에 장 폴 고티에는, 의상 조합에 가입하여 '고티에 파리'라는 오뜨 쿠튀르 컬렉션을 시작했다. 고티에가 쿠튀르 컬렉션에서 선보인 이브닝드레스, '마니리에르'는 큰 인기를 끌었고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다.

2003년, 마르지엘라는 에르메스를 떠나게 되었다. 2004년 그 빈자리를 채운 인물은 그의 스승이었던 장 폴 고티에였다. 처음에는 걱정 반 기대 반의 여론이었지만, 고티에는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브랜드의 대명사인 에르메스에서 자신만의 반항아적 감성을 더하여, 유쾌하고 독특한 그만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2010년까지 약 6년간 에르메스의 디렉터로 활동을 이어갔던 고티에는, 에르메스의 클래식한 이미지와 자신만의 느낌을 더한 컬렉션들을 제시하면서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5. 50여 년간의 디자이너 인생과 그 마지막

1970년 피에르 가르뎅의 조수에서 시작하여 자신만의 오뜨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이기까지, 약 50년이라는 시간 동안 장 폴 고티에는, 그의 유머러스하고 쾌활한 성격을 담은 혁신적이며 독특한 디자인들을 통해 많은 사랑을 받은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첫 컬렉션의 50주년이 되는 2020년에, 2020 S/S 오뜨 쿠튀르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하며 디자이너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평소 유쾌한 성격처럼 그는 은퇴 소식을 개인 소셜 미디어로 알렸다. 2020년 1월 22일, 샤틀레 극장에서 열린 그의 마지막 쇼는 장 폴 고티에라는 디자이너의 아카이브를 보여주는 일대기라고도 할 수 있는 쇼였다.

그가 영감을 얻곤 했던, 1980년대 유명 밴드 '컬처 클럽'의 보이 조지가 쇼의 시작을 알렸고, 에이미 하우스의 '백투 블랙'과 함께 펑키 페티시룩을 입은 모델들의 런웨이로 진행됐다. 킬트, 싱글렛, 아미 부츠와 함께, 그의 디자인 중 가장 대표적인 아이템이라 할 수 있는 콘 브라와 코르셋 또한 등장하며, 샤틀레 극장을 가득 매운 1500여 명의 관중들이 환호를 지르기도 했다.

장 폴 고티에는 "오뜨 쿠튀르 브랜드인 '고티에 파리'는 지속될 것이며, 자신은 또 다른 새로운 개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밝혔지만 후임자 지명 여부나 구체적인 계획에 대한 설명은 아직 없다.

'패션계의 악동', 장 폴 고티에의 디자이너 생활은 공식적으로 끝을 맺었지만, 그가 남긴 컬렉션들은 차세대 디자이너들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고, 그로 하여금 고티에는 앞으로도 회자될 것이다.

그의 명언과 함께 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늘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옷을 잘 못 입는 사람들이다." - 장 폴 고티에


PS. 그의 명언이라 알려진, "늘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옷을 잘 못 입은 사람들이다."라는 말은 사실 일부를 생략한 것이라고 합니다.

원래 그가 했던 말은 "Les gens qui s'habillent mal, qui accumulent les erreurs de goût, sont ceux qui m'intéressent le plus."로, 직역하자면 "옷을 못 입고, 취향의 실수를 거듭하는 사람들이 내게 가장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즉, 자신에게 어울리든 그렇지 않든, 자신의 취향만을 무조건적으로 고집하는 사람들이 흥미로웠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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