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는 구찌오 구찌가 이탈리아 피렌체에 설립한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이다. 구찌오 구찌는 1921년 피렌체에 자신의 성을 딴 ‘구찌’라는 가죽제품 전문점을 열어 이후 세 아들과 함께 1940년대 무렵 밀라노, 로마 등 이탈리아 패션 중심지를 비롯해, 1950년대부터 런던, 뉴욕, 파리 등 전세계로 매장을 확대하였다. 현재 핸드백, 여행 가방, 신발, 실크, 시계, 파인 주얼리 등을 선보이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로 자리잡고 있다. 아이웨어는 사필로, 향수는 P&G와 라이선스 형식으로 생산·유통하고 있으며 구찌의 제품은 직영 스토어와 백화점 및 전문 스토어를 통해서만 판매하고 있다.
2. 구찌의 탄생 및 설립자
구찌의 창립자 구찌오 구찌와 아들인 로돌프 구찌가 1940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매장 앞에 서 있는 모습
구찌의 창립자 구찌오 구찌는 1881년 이탈리아 피렌체, 밀짚모자 제작을 가업으로 하는 집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구찌오 구찌는 밀짚모자 제조업이 사양 산업이라고 판단하고 1897년 당시 전 세계의 부호들이 모이는 런던의 사보이 호텔로 갔다. 구찌오 구찌는 이 곳에서 벨보이로 일하며 귀족과 상류층의 기호 및 문화를 익혔다. 부유한 호텔 손님들의 최고급 러기지에 깊은 인상을 받은 구찌오 구찌는 1902년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가 '프란지' 라는 가죽 제조업체에서 가죽 공방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1921년 구찌오 구찌는 피렌체에 있는 비냐 누오바 거리에 ‘구찌’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첫 번째 가죽제품 전문매장을 열었고 연이어 같은 해 빠리오네 거리에 두 번째 매장을 내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초창기 구찌는 설립자인 구찌오 구찌가 사보이 호텔에서 근무하며 접했던 영국 귀족의 스타일에, 섬세한 가죽 가공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장인 기술을 결합하여 장갑 및 부츠와 같은 승마 용품을 중심으로 한 가죽 제품을 주로 선보였다. 이것이 ‘구찌’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3. 구찌의 역사
1) 사업의 확장부터 뱀부 백의 탄생까지
구찌오 구찌가 생산한 승마 용품은 승마를 스포츠로 즐기는 이탈리아 귀족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마차의 활용도는 과거보다 줄어들어 다양한 제품 라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37년 구찌오 구찌는 작업장을 확장하여 핸드백, 트렁크, 장갑, 신발, 벨트 등 생산 제품을 좀 더 다양화하기 시작했다. 구찌의 가죽 제품은 승마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이 많았다. 특히, 승마용품인 호스빗(Horsebit, 말 재갈)과 등자를 활용하여 가죽용품에 장식하는 것은 구찌의 고유한 상징이 되었다.
1940년대 구찌오 구찌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말기의 위기 상황을 현명하게 극복했다. 모든 물자가 전쟁에 동원되고 국제연맹이 이탈리아로 수출 금지령을 내려 금속, 가죽 등의 소재가 부족했던 시기, 아버지 구찌오 구찌의 사업을 돕고 있었던 첫째 아들 알도 구찌는 대마, 삼마, 황마, 대나무 등의 대체품을 소재로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알도 구찌는 이탈리아 나폴리산 대마와 삼마를 이용하여 작은 다이아몬드 형태가 서로 연결되는 형태로 직조하고 이를 여행 가방에 사용했다. 이로써 탄생한 구찌의 디아만테 캔버스는 구찌의 첫 시그니처 프린트가 되었다.
동시에 구찌는 매장 확장에 힘을 쏟았다. 구찌는 1938년 당시 이탈리아 패션의 중심지이자 전 세계 부호들이 자주 찾는 쇼핑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로마 콘도티 거리에 새로운 구찌 매장을 열었다.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패전국인 이탈리아의 물자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수많은 이탈리아의 가죽 업체가 도산했다. 알도 구찌는 일반적인 가죽 대신 돼지피혁(Pigskin,스웨이드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을 활용하는 대안을 찾았다. 유일하게 수입 가능했던 일본산 대나무를 활용하는 아이디어도 내놓았다. 이처럼 전쟁 후의 위기는 오히려 구찌의 뱀부 백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찌 러기지(1935)
구찌 뱀부 백(1947)
2) 가족 경영의 시작, 글로벌 브랜드로의 성장
구찌오 구찌는 구찌를 직접 경영하는 한편 세 아들 알도 구찌, 바스코 구찌, 로돌프 구찌를 회사의 주주로서 경영에 참여시켰다. 1951년 로돌프 구찌는 밀라노 몬테나폴레오네 거리 5번지에 구찌 매장을 열었고, 2년 후인 1953년 알도 구찌는 뉴욕 58번가 사보이플라자 호텔에 구찌 매장을 열었다. 이로써 구찌는 뉴욕에 진출한 최초의 이탈리아 브랜드가 되었다.
1953년 창립자인 구찌오 구찌가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첫째 아들인 알도 구찌와 셋째 아들인 로돌프 구찌가 각각 50%씩 경영권을 나눴다. 알도 구찌는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을 발산하며 구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알도 구찌는 1961년 창립자이자 아버지인 구찌오 구찌의 이름을 딴 GG 로고를 만들고 이를 캔버스 소재로 만들어 가방, 액세서리, 옷에 사용했으며 같은 해 재키 백을 만들었다. 또한 알도 구찌는 1961년 팜비치, 1968년 비버리 힐즈를 비롯하여 1972년 도쿄와 1974년 홍콩에 구찌 매장을 내며 구찌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창립자의 첫째 아들인 알도 구찌(우)와 영화배우 클라크 게이블(좌)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던 창립자의 아들 로돌프 구찌
구찌는 1975년 향수, 1979년에는 액세서리 컬렉션을 론칭과 라이선스 사업도 시작했다. 1977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한 미국 베버리 힐즈의 구찌 매장에는 리타 헤이워드, 마이클 케인 등 톱스타들이 찾아와 금과 다이아몬드 체인을 장식한 1만 달러 상당의 백과 여우털로 만든 호사스러운 침구를 구입하여 럭셔리 브랜드로서의 구찌의 명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1981년 구찌는 피렌체에서 첫 레디투웨어 패션쇼를 열었고, 쇼에서 구찌의 상징 중 하나인 플로라 프린트로 만든 제품들을 대거 선보였다.
1980년대 구찌 로마 스토어 전경
3) 가족 경영의 위기와 전문 경영인 체제로 변화
1982년, 구찌는 가족 경영진의 결정을 통해 디자인부터 생산, 유통까지 전 과정을 맡아 경영하는 S.P.A로 전환하고 로돌프 구찌가 경영권을 가지게 되었다. 1년 뒤, 로돌프 구찌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마우리초 구찌가 경영권을 승계했다. 이에 알도 구찌의 아들인 파울로 구찌는 크게 반발하며 파울로 구찌라는 이름으로 핸드백, 액세서리, 와인 등을 판매하는 저렴한 브랜드를 만들었다. 이는 구찌 이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이탈리아 전통의 가족 경영에 위기를 불러왔고 그 사이 구찌의 재정난도 심화되었다.
마우리초 구찌는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1989년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 의 뉴욕 지사장 돈 멜로를 구찌의 디자인 총괄이사로 영입했다. 돈 멜로는 구찌에 새로운 디자인 팀을 꾸렸다. 훗날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당시 29세의 디자이너 톰 포드도 이때 구찌 디자인 팀에 합류했다. 마우리초 구찌는 하버드 출신에 워싱턴의 법률회사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던 이탈리아인 도메니코 데 솔레를 구찌 아메리카의 사장 겸 관리이사로 영입했다. 이로써 구찌에 전문 경영인 시대가 시작되었다. 도메니코 데 솔레는 유통을 직접 통제하는 동시에 그동안 남발했던 구찌 브랜드의 라이선스 사업을 정리하고 프랜차이즈도 환수했다.
4)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영입
바레인에 본사를 둔 투자 회사 인베스트코프는 1987년부터 구찌의 지분을 인수했다. 1989년 인베스트코프는 구찌 주식의 50%를 매입했고 1993년 마우리초 구찌가 자신이 보유한 50%의 주식 지분을 매각하면서 인베스트코프가 회사의 전체 지분을 소유하게 되었다. 구찌 내부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다. 1995년 돈 멜로는 구찌를 떠나 버그도프굿맨 백화점의 회장으로 돌아갔고, 도메니코 데 솔레는 CEO가 되었다.
1994년 톰 포드는 컬렉션은 물론 선글라스, 향수, 광고, 매장 등 구찌의 모든 외양을 책임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톰 포드가 1995년에 선보인 구찌의 '젯셋 글래머' 테마는 좋은 반응을 얻었고 로고, 호스빗 등 구찌의 옛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이며 전통과 새로움을 동시에 부각했다. 무엇보다 톰 포드가 매장과 광고 이미지까지 일괄적으로 감독하면서 새로워진 구찌를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구찌의 변화는 성공적이었다. 1998년 유럽 언론협회는 구찌를 ‘올해의 유럽 기업’에 선정했다. 톰 포드 이후 패션계에서는 단순히 옷을 디자인하는 수석 디자이너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 매장 구성과 광고까지 진두지휘하며 브랜드 전체의 이미지를 만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포지션이 유행하기도 했다. 2000년, 구찌는 구찌 그룹으로 이름을 바꾸고 당시 피노 프랭탕 레두트였던 PPR 그룹과 전략적 제휴를 맺으며 구찌를 중심으로 한 럭셔리 포트폴리오 구축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전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리다 지아니니
2004년 7월, 구찌의 변화를 주도했던 톰 포드와 도메니코 데 솔레가 재계약에 대한 PPR 그룹과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구찌를 떠났다. 이에 남성복 디자인의 존 레이, 여성복 디자인의 알렉산드라 파치네티, 액세서리 라인의 프리다 지아니니로 구성된 3인 디자이너 체제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프리다 지아니니는 펜디의 전 핸드백 디자이너였고 2002년 구찌 그룹에 합류했다. 프리다 지아니니가 맡은 액세서리 라인이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 2006년 그녀는 구찌 전체를 단독으로 총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프리다 지아니니가 브랜드를 맡은 후 4년간 구찌의 매출은 46% 신장했고, 구찌는 2007년 시장조사전문회사인 닐슨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갖고 싶은 럭셔리 브랜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9년, 패트리지오 디 마르코가 마크 리를 대신하여 CEO로서 구찌에 합류했다. 같은 해, 구찌는 디자인 사무실을 로마의 빨라조 알베리니로 옮겼다. 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2015 F/W 패션쇼로 데뷔한 알레산드로 미켈레이다.
4. 구찌의 새로운 기술 및 발명
1) 더 웹
세 가지 컬러가 조화된 구찌의 더 웹은 1951년 말 등에 안장을 고정시킬 때 사용하는 캔버스 띠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그린-레드-그린’ 컬러 조합이 기본으로 흔히 ‘GRG’라고도 불리며, 이를 응용한 ‘블루-레드-블루’ 컬러 조합은 ‘BRB’라고 불린다. 'GRG' 더 웹은 오랜 세월에 거쳐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는데 1950년대에는 여행가방, 1961년에는 재키 백, 1970년대에는 A라인 스커트에 자주 사용되었고 프린트나 가죽 패츠워크로도 변형되었다. 1961년에 처음으로 선보인 GG 로고와 더불어 구찌의 제품임을 한눈에 각인시키는 구찌의 홀마크로 사용됨과 동시에 특유의 스포티한 분위기로 구찌의 젊고 세련된 감각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구찌 더 웹(1971)
2) 플로라
창립자 구찌오 구찌의 아들인 로돌프 구찌는 1966년 모나코의 왕자비 그레이스 켈리를 위해 플로라 패턴을 만들었다. 당시 그레이스 켈리는 남편인 모나코 레니에 왕자와 함께 밀라노 구찌 매장을 방문하여 그린 컬러의 뱀부 핸드백을 구입했다. 로돌프 구찌는 그레이스 켈리에게 선물하고 싶으니 제품을 하나 더 고르라고 권했다. 그레이스 켈리는 스카프를 원했는데 당시 구찌에는 스카프가 없었다.
로돌프 구찌는 특별한 손님에게 단 하나의 스카프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즉시 일러스트레이터 비토리오 아코르네로에게 스카프 디자인을 요청했다. 다음 날 비토리오 아코르네로는 사계절을 대표하는 꽃과 열매, 곤충이 어우러진 일러스트를 가지고 왔고 이렇게 구찌 플로라가 탄생되었다.
구찌 플로라 블라우스를 입은 캐롤라인 그리말디 모나코 왕자비(1973)
5. 구찌의 대표 상품 라인
1) 뱀부 백(Bamboo Bag)
구찌는 1947년에 ‘0633’이라는 모델 번호로 뱀부 백을 선보였다. 이때 선보인 첫 뱀부 백은 부드러운 돼지피혁 소재로 몸통을 만들고 일본산 대나무 손잡이를 부착한 작은 사이즈의 핸드백이었다. 13시간 가량 대나무에 열을 가해 둥근 형태로 구부린 것은 말 안장의 곡선적 형태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승마 용품에서 영감을 받은 초창기 구찌 제품의 디자인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뱀부 백은 4개의 금속 고리를 사용해 둥근 대나무 손잡이를 가방에 부착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돼지피혁과 대나무 손잡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이 된 이탈리아의 열악한 상황에서 구찌가 내놓은 대안이었고 자연 소재를 최대한 부각해 디자인에 적용한 아이디어는 훗날 패션사에서 중요한 혁신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점차 뱀부는 구찌의 상징이 되어 우산 손잡이, 시계, 벨트, 구두, 스카프의 패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구찌 제품에 활용되었다. 톰 포드가 구찌에 와서 가장 처음으로 재해석한 것도 뱀부 백이었다. 2010년에는 프리다 지아니니가 뱀부 백을 재해석하여 ‘뉴 뱀부 백’을 출시했다.
뱀부 백 제작과정
구찌 뉴 뱀부 백
2) 호스빗 로퍼(Horsebit Loafer)
호스빗 로퍼는 1953년 승마용 재갈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구찌를 대표하는 신발이다. 1959년, 칸의 호텔 테라스에서 알랭 들롱이 호스빗 로퍼를 신고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와 함께 앉아 있는 흑백사진은 호스빗 로퍼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호스빗 로퍼는 금속 장식을 신발의 발등에 장식하는 획기적인 시도를 인정받아 1985년부터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디자인과 크래프트맨십의 패셔너블한 시도’라는 타이틀로 영구 전시되어 있다. 구찌는 2013년 호스빗 로퍼의 탄생 60주년을 맞아 익스클루시브 1953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1959년, 칸 영화제에 간 알랭 들롱과 로미 슈나이더
3) 재키 백(Jackie Bag)
1950년대 구찌가 출시한 둥근 모서리의 숄더 백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리타 헤이워드, 브릿 에클랜드 등 당대의 여배우뿐만 아니라 소설가 사무엘 베케트 등 남성도 즐겨 메곤 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착용자는 재클린 오나시스였다. 재클린 오나시스는 1960년대 전반에 걸쳐 공식석상과 개인적인 모임에 이 백을 자주 들었고, 이는 이 백이 재키 백이라고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GG 캔버스 천에 GRG 더 웹 스트랩이 조화된 재키 백은 여전히 구찌의 베스트셀러이다.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리다 지아니니는 2009년 재키 백을 ‘뉴 재키 백’이라는 이름으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둥근 모서리는 오리지널 재키 백을 그대로 닮았고 바이올렛, 에머랄드 등 다양한 컬러와 악어가죽, 타조가죽, 송아지 가죽 등 다양한 소재를 적용하였으며 뱀부와 긴 가죽 테슬 장식을 더하여, 좀 더 활기차고 강인한 분위기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사무엘 베케트가 1971년 구찌 백을 멘 모습
재키 백의 주인공인 재클리 오나시스(1970)
6. 구찌 브랜드 특징
1) 이탈리아 전통을 고수하는 구찌
구찌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작된 브랜드로서 이탈리아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온갖 꽃과 곤충이 조화된 구찌의 플로라 패턴에서는 이탈리아의 정열적인 에너지가, 물자가 부족한 시절에 개발된 뱀부 백에서는 이탈리아 특유의 긍정적인 판단력이 엿보인다. 창립자 구찌오 구찌와 그의 세 아들, 손자까지 합세하여 이룬 이탈리아 가족기업이라는 전통 역시 구찌의 개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구찌 가문의 가족기업 이야기는 한때 영화화가 검토되었을 정도로 대담하고 열정적이다.
케링 그룹이라는 거대 패션 기업에 포함되어 있는 현재에도 구찌는 이런 역사와 가치를 잘 보전하고 계승하고 있다. 구찌는 2011년 창립 90주년을 맞아 이탈리아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메르칸치아 로지아 궁전에 구찌의 역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박물관 구찌 뮤제오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이탈리아 전통을 보존하고자 하는 구찌의 노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2) 시대 아이콘들과 함께 해온 구찌
구찌의 다양한 제품 라인들은 유명인사들의 사랑을 받으며 브랜드 인지도를 더욱 높여왔다. 1947년 출시된 구찌의 대표 상품인 뱀부 백은 그레이스 켈리, 데보라 커 등 당시 유명인사들이 애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뱀부 백은 여러 영화에 등장하기도 했다.
1954년에는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영화 ‘이탈리아 여행' 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이, 1958년 리처드 브룩스감독의 영화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 1966년에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 ‘욕망’에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뱀부 백을 들고 나와 인기를 얻기도 했다.
1953년 출시된 호스빗 로퍼 역시 클라크 게이블, 존 웨인, 프레드 아스테어 등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배우와 영화감독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애용했고, 특히 1960년 영화배우 알랭 들롱이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 ‘태양은 가득히’에 구찌 호스빗 로퍼를 신고 나온 뒤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재클린 오나시스가 자주 들어 그녀의 이름이 붙기도 했던 재키 백은 그녀 이전에도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1951년작 ‘유로파 51(Europa 51)’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이 착용하고 등장하여 인기를 끌기도 했다.
7. 구찌의 현재
현재 알렉산드로 미켈레가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미켈레는 이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프리다 지아니니가 2014년 갑작스럽게 구찌를 떠난 이후, 마르코 비자르의 영입으로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벌, 새, 꽃 등이 수놓아진 제품들이 바로 미켈레로부터 디자인된 제품들이다.
프리다 지아니니가 떠난 구찌에 대해, 구찌의 팬들은 상당히 우려했고, 미켈레가 선보인 첫 쇼에서 벌, 새, 꽃 등의 자수가 새겨진 제품들을 보고 "구찌가 미쳤다.", "구찌는 망했다." 라는 의견들이 다수였다. 하지만 화려하고 개성 강한 자수 제품들의 판매가 점차 증가했고 이러한 우려의 목소리는 금새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구찌의 악세사리 디자이너 중 한명이자 12년동안 무명 디자이너에 불과했던 그는, 새 CEO인 마르코 비자리와의 대화에서 기존의 심심하고 밋밋한 맛의 디자인을 꽃, 벌 등이 새겨진 디자인으로 바꾸는 것이 구찌가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했다. 마르코는 여기서 그의 가능성을 보고 바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했던 것이다.
그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고 다음 컬렉션을 발표하기까지 일주일이라는 시간밖에 없었다. 그는 일주일의 아주 짧은 기간동안 구찌의 컬렉션을 준비했고, 전에 말했던 벌, 꽃 등의 디자인을 선보임으로써, 미니멀리즘이 주가 되었던 패션계에 새로운 맥시멀리즘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남성복과 여성복을 나누지 않고 통합하여, '젠더리스룩'을 함께 제시하며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미켈레의 구찌는 꾸준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지만 라이톤, 마몬트, 자수 스니커즈 이후로 대중에게 크게 주목을 받거나 눈에 띄는 성공을 만들어낸 제품들은 아직까지 제시하지못했다. 하지만 이번 2020,21 F/W에서 획기적인 무대 퍼포먼스와 디자인들을 선보이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인형의 집' 이라는 컨셉으로 백스테이지에서 스텝들과 모델들의 분주한 모습까지 공개하며, 마치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듯 무대를 연출했다. 무대 연출뿐만 아니라 디자인적인 부분에서도 재미있는 요소들을 찾을 수 있었다. 묘한 르네상스, 중세 유럽의 무드와 6~70년대 히피, 펑키, 럭셔리를 적절히 섞으며, 미켈레만의 너드하고 힙한 무드가 더해지면서 미켈레 산하의 구찌에서만 볼 수 있는 시그니처 무드를 여과없이 보여줬다.
맥시멀리즘을 추구하든 미켈레의 구찌는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반대로 맥시멀한 디자인으로 인해 과하다는 평가 또한 함께 받고 있다. 하지만 미켈레의 역량을 생각해보면 앞으로의 구찌가 어떤 디자인을 선보일지 기대되는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