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성서 속 '종말'의 의미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뒤, 50년 뒤 우리 모습은 물론 사실 당장 내년에 내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상상하기도 쉽지만은 않다.
2010년대까지만 해도 세상의 끝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거 같다. 원래는 '빅뱅'과 '빅크런치'라는 명확한 시작과 끝에 대해서 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과학자들은 빅뱅 이 전에도 무언가가 있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고 우주의 끝에 대해서는 그냥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지는 거 같다. 시작점 없이 영원했던 우주 속에 살아가는 영생에 가까워지는 인간은 앞으로도 종말, 죽음에 대한 걱정이 없는 듯했으나, 코로나 확산과 기후 변화 등으로 미래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는 거 같기도 하다.
우린 언제나, 죽음, 그리고 종말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을 안고 살아왔다. 지금은 할리우드 영화 빌런들이 툭하면 인류를 멸하겠다고 하거나, 이미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이 자주 등장하는 거 자체가 이 불안과 두려움이 얼마나 보편적인 것인지 대변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는 대표적으로 북유럽 신화에 있는 종말론을 다룬다.
그렇다면 신화와 내러티브를 통해 전해지는 종말에 대한 '예언'이나 이 모티프를 통해 우리 조상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확실한 건 모든 스토리는 스토리텔러가 처한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금은 단순 재미 유발과 범국가적 재난을 과학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인류(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의 힘에 대한 자신감을 분출하는 걸 수도 있다.
반대 케이스로 1세기 유대인들을 들 수 있다. 66년에 유대-로마 전쟁에 패한 결과, 티투스 장군의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워버렸다. 이 성전은 야훼에게 통하는 관문 같은 곳이었다. 성전이 파괴된 후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은 이 땅 가운데 일하는 신이라는 걸 믿지 않기 시작하고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요소가 뒤섞인 영지주의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영지주의자들은 현세를 만든 조물주를 악한 신으로 가르치고 육체를 초월한 지혜를 통해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쳐, 나라와 세계관이 처절하게 파괴된 유대인들에게는 매력적인 대안일 수밖에 없었다.
히브리 성서에 기록된 종말론 역시 고대 이스라엘의 현실을 반영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그들이 종말과 세상의 끝을 바라보는 관점을 통해 우리 현대인들도 고민해 볼 부분이 있다고 생각이 된다.
고대에는 '종말'이라는 주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문학 양식이 있었는데, 바로 계시 문학('Apocalyptic Literature')이다. 이 용어의 어원인 고대 그리스어'아포칼룹시스'(ἀποκάλυψις)는 문자 그대로 무언가 감춰져 있던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는 행위, 즉 '계시'를 의미한다. 더 나아가 같은 사회현상을 보더라도 신은 계시를 통해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해주는 문학이 바로 계시 문학, 혹은 묵시 문학이다. 미래가 아닌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바로 그것의 목적이다. 가장 유명한 계시문학의 예는 바로 신약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다.
이 단어는 지금 영어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사실 '종말'과 동의어로 상습적으로 사용된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제목이 "Apocalypse Now"이다. 그리고 영어로 "the Apocalypse"는 정말 문자 그대로 인류와 모든 문명, 지구의 종말을 뜻한다고 많은 오해를 받아왔다. 그동안 'Apocalypse' 그리고 '종말'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 때문에 계시문학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모든 '계시 문학'도 당연히 '종말'에 대한 계시 아닌가? 애석하게도, 계시문학은 종말을 계시하기는 하나, 문제는 이를 기록한 사람들의 의도한 '종말'의 의미와 우리가 '종말' 하면 떠오르는 그림과 의미가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말' 하면 "2012", "문라이즈"나 "터미네이터" 같은 그림을 생각한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재난으로 지구가 멸망하거나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심판의 불을 내리는 등. 고대 계시문학, 심지어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도 이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히브리 성서에 수록된 문헌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계시문학은 다니엘서인데, 이 두루마리를 탐구하면서 히브리 성서의 종말론에 대해서 알아가보록 하자.
성서를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12장 중에서 첫 6장의 내용만 기억하는데, 어린이 성경학교에서 다루기 좋은 이야기가 많이 때문이다. 그런데 다니엘("신은 나의 재판관" דָּנִיֵּאל)은 여러모로 특이한 문헌이다. 우선 다른 책들과는 달리 그 내용의 절반 이상이 히브리어가 아니라 당시 고대근동의 공용어였던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다니엘 7장도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바벨론에 살아가는 한 유대인 청년의 스토리처럼 느껴지다가 7장부터 갑자기 책의 장르 자체가 달라지는 거처럼 느껴진다.
다니엘 7장에는 당시 바벨론 왕실에서 근무 중인 유대인 다니엘에게 찾아오는 환상을 기록한 것이다. 다니엘서는 히브리 성서에 포함된 가장 대표적인 계시문학이다.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더라 첫 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또 보니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쪽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머리 넷이 있으며..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매우 강하며 또 쇠로 된 이가 있어서..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더라(단 7:5~8)
우선, 다니엘이 남긴 기록만 보더라도 고대 이스라엘의 계시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있다. 먼저, 생략되었지만, 7장 1절에 이 환상은 신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 재위 기간 중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환상 속에 등장하는 짐승들은 네 번째를 제외하고 모두 두 가지 동물의 혼합된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당시 바벨론뿐만 아니라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들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실제로 다니엘처럼 바벨론에 전쟁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자신들과 너무나 다른 바벨론의 문화를 보고 많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구체적인 왕의 이름과 짐승들의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의 계시는 철저히 그들이 살아간 현실을 반영한 문학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실제로 성서에 기록된 모든 종말에 대한 예언이 담긴 계시 또는 묵시 문학은 고대 유대인들이 살아가고 있었던 실제 상황 가운데 발생하는 일들을 자신들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문학이다. 그렇다면 이 짐승들은 무엇을 의미한 걸까? 7장 후반부에 다니엘은 환상 속에 등장하는 성자를 찾아가서 그 의미를 물어본다.
그 네 큰 짐승은 세상에 일어날 네 왕이라(단 7:17)
넷째 짐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열 개의 뿔을 가지고 있다는 점인데, 히브리 성서에서 "뿔"은 나라를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그 열 뿔은 그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단 7:24~25)
이 짐승은 "성자들"(קַדִּישׁ 세상과 구별된 야훼의 선택받은, 혹은 그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자)과 싸워 이긴 세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자, 곰, 표범, 그리고 넷째 짐승은 각각 바벨론, 페르시아,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제국, 그리고 넷째 짐승은 대부분 학자들은 로마라고 해석한다. 이 때문에 많은 전문가들은 다니엘서가 실제 역사적 사건 이후로 써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거처럼 중요한 건 이 글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당시 유대인들의 상황이다. 다니엘과 유대인 포로들 입장에서 바벨론이 멸망한 후에 수 차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소식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환상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9절부터 환상의 후반부가 시작되는 데 여기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The Ancient of Days")가 등장한다. 이는 시간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진 야훼를 지칭하는 다른 표현이다. 야훼 주변에는 흰 옷을 입은 "섬기는 자"들이 모여있다.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그 때에 내가 작은 뿔이 말하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상한 바 되어 타오르는 불에 던져졌으며 그 권세를 빼앗겨.. (단 7:10-12)
다니엘은 이것의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을 듣는데(단 7:18), 마지막 제국은 야훼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세상의 질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환상 안에서 짐승이 죽임을 당한 직후 "인자 같은 자"가 야훼에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4)
"인자"는 말 그대로 "인간"을 뜻하는 말이다. 예언자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표현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뜻하기도 하다. 언뜻 보면 한 명의 선택된 사람, 즉 메시아를 뜻하는 것 같기도 하는데, 실제로 기독교에서는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다니엘의 환상은 바벨론이라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야훼의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존재 목적에 대한 상기이다.
바벨론 이후에 또 다른 세력에 의해 지배를 받는 고난한 현실 속에서도 야훼가 인간과 그의 백성들을 위한 목적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야훼가 직접 심판을 내려 본래 창세기에 온 땅을 야훼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인간의 본래 창조 목적을 이루겠다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다니엘은 훗날 기독교의 요한계시록의 모델이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과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이 각각의 메시지를 듣고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처한 상황을 다른 시선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거 같다. 새로운 짐승이 다시 나타나는 거처럼 때로는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 힘들어 내가 믿었던 신이 과연 있는가 의심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지만, 계시 문학은 야훼의 백성들에게 어려움 속에서도 그를 믿고, 바벨론, 그리고 로마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히브리 성서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쉐마를 지키며 살아가도록 가르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9)
코로나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할 때 이거야말로 정말 "apocalyptic"("apocalypse"의 형용사형)한 현상이었다. 코로나 초창기 때 세계의 교회들이 이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딱 반으로 나뉘는 걸 기억한다.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코로나는 악한 세상에 대한 신의 심판이기 때문에 국가의 지시와 무관하게 더 열심히 모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교회의 사회적 입지가 어떻게 됐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반면에, 코로나를 통해 교회를 되돌아보는 지도자들도 있었다. 비대면 예배가 일반화되던 코로나 시절 동안 신앙을 잃는 신도들이 많았는데, 공동체와 멀어지는 순간 개인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새로운 관점으로 자신들의 상황을 보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코로나가 정말로 "apocalyptic"한 현상인 거 같다.
다니엘은 표면적으로는 완전한 바벨론 사람이다. 그는 바벨론 옷을 입고, 음식을 먹고 바벨론의 학문으로 교육을 받고, 이방신을 섬기는 바벨론 황실에서 일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가 야훼의 백성이라는 걸 잊지 않고 소신을 지킨다. 다니엘뿐만 아니라 그 당시 바벨론 곳곳으로 흩어진 유대인 대부분 이렇게 야훼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이 거하는 곳과 상호작용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이 있어서 다니엘서와 같은 계시문학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대 이스라엘은 같은 확고한 정체성과 목적의식이 반영된 문학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이들의 세계관은 소멸되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은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