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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ribe Apr 07. 2023

신과 하나 됨

진정한 자유를 향한 길 

우리는 대부분 자유시장 경제체제라는 종교의 신자로 살아간다. '자본신'은 은혜 가운데 기회의 평등이라는 은사를 내리셨고, '자본신'에게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바로 열심히 성과를 올려 '성공의 사다리'를 한 걸음, 한 걸음 올라 더 정상에 도달하는 거다. 하지만 인간은 때로 자아실현, 봉사와 같은 그릇된 샛길로 빠지기도 하고, 노력해도 성공을 못 할 가능성이 훨씬 커 '자본신'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자비로우신 '자본신'은 이제 근면과 성실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예배도 받아주신다. 그를 찬양하는 방법이 어느 때보다 다양해졌고 인간 제물까지 받아주신다. 자비로운 '자본신'은 '성공의 사다리' 정상에 도달한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은 노력, 좌절, 성과라는 순환하는 인생으로부터 자유케 하실 것이다. 


모든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대부분의 세계관은  씌워진 프레임 속에서 구원을 찾는다는 점이다. 내가 속한 집단이 내게 가지는 기대를 충족시켜 그 안에서 경지에 도달하는 것. 자본주의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불안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가 되는 게 가장 확실한 구원의 길이다. 아이러니한 건, 우리를 구속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요인들이 대부분 구원 방법을 제시하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것들이라는 점이다. 


히브리 성서는 죽음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라고 가르친다. 신의 모양에 따라 빗어진 인간이었지만, 스스로 신으로부터 멀어졌다. 신은 모든 생명과 선의 원천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한 번은 이미 죽음을 경험했다. 히브리 성서는 그럼 이 죽음이라는 인간 상태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지 탐구해 보도록 하겠다. 


Atonement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절기 중 하나가 '속죄일'(יוֹם כִּפֶּר, "yom qippur"  / 'Day of Atonement')이다. 한국어로 '속죄'라는 단어를 들으면 성도들이 예배당에 모여 통곡하면서 방언 기도하는 거밖에 생각 안 날 수도 있기 때문에, 영어로 '속죄'를 뜻하는 'atonement'라는 단어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옥스퍼드 영사전에 의하면 'atonement'는 'making amends for a wrong or injury' 다시 말해, 내가 한 잘못에 대한 보상을 치른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건 이 단어의 어원인데 이는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이라는 학자가 히브리 성서를 최초로 히브리어 원어로부터 영어로 번역하면서부터 유입된 단어다. 라틴어로 '화합'을 뜻하는 'adunamentum'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해 인간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삶을 바꿈으로써 신과 '화해'한다,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 됨("at one" +~ment)이라는 뜻이다. 


이 속죄, 즉 신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는 원리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몇 가지 있다. 


아벨의 새끼 양 

가인과 아벨은 우리가 가장 많이 들어본 성서 이야기이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인데, 형 가인은 농부였고 동생 아벨은 양을 쳤다. 두 형제 모두 신에게 제물을 바쳤는데, 신은 아벨의 제물을 더 기뻐했다. 형은 동생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고 신은 그를 먼 곳으로 추방한다. 성서에 기록된 최초의 살인이자 최초의 죽음이다. 


티치아노의 "가인과 아벨" (출처: 위키백과)


성서 내러티브는 때로 너무 단순해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궁금증을 유발하는 특징이 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신이 왜 하필 아벨의 제물을 기뻐한 것일까? 농사꾼인 가인은 "땅의 소산"(창 4:3)(작물, 청과물 등), 아벨은 새끼 양을 바쳤는데,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일을 통해 발생한 소산을 바친 것이다. 교회 주일학교에 가면 가인이 먹다 남은 걸 바쳤기 때문이라고 가르치는데 텍스트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 힌트는 더 큰 스토리의 맥락 안에 있다. 사건이 있기 바로 직전,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데, 야훼는 이들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야훼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두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이들에게 왜 옷을 입힌 걸까? 인간이 금지된 열매를 먹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은 것이다. 어린아이가 거짓말하다가 엄마한테 들켰을 때처럼 모든 죄 뒤에는 수치심이 따른다. 신은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려주기 위해 옷을 입힌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옷은 어디서 난 걸까? 창세기 저자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게 하늘에서 내려온 옷은 아닐 테니, 가죽옷을 입으려면 그 가죽을 확보해야 하는데, 신은 이 옷을 지어주기 위해 동물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무화과나무 잎으로 된 옷을 입히고 내보내도 될 텐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야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 17) 


히브리 성서에서 "죽음"이라는 단어에는 너무 다양한 해석과 신학적 의미가 들어가 있어 블랙홀 같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여기에는 육체적 죽음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간이 창세기 2장에서 신이 경고했음에도, 금지된 열매를 먹고 죽지 않은 것이다. 신은 가죽을 내준 동물을 죽인 것이다. 


다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그럼, 신이 동생 아벨의 제물에 기뻐한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 양 떼 중 새끼를 죽여 제물로 바침으로서 인간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아벨은 자기 부모가 입고 나온 가죽옷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은 몸, 그들의 수치를 가려준 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인간이 죄를 지어 낙원에서 추방당한 마당에 신이 그런 인간을 보고 기뻐하는 거 자체가 진정한 기적일지도 모른다. 


히브리 성서는 이를 '겸손'이라고 가르친다. 성서에 기록된, 어쩌면 최초의 '속죄 스토리'가 될 수도 있었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속죄의 첫 관문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아벨처럼 우리가 처한 현실, 인간 상태와 세상 속의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벨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그 양 새끼처럼 누군가가 그 짐을 대신 져야 한다는 것도 이해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숫양 

이번에는 히브리 성서에서 어쩌면 가장 유명한 '속죄 스토리'를 보겠다. 이스라엘의 조상이자 세계 3대 유일신 종교의 '믿음의 조상'이라고도 불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다

야훼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신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번제로 올리라고 명한 이유를 이해하는 게 우선 중요하다. 원래 그의 아내 사라는 불임이었는 데다가 나이가 100세가 다 되도록 자식이 없었다. 히브리어로 "이삭"은 "웃음"(צָחַק tsa-chaq)이라는 뜻인데,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많은 후손들을 약속했고 그가 100세가 되었을 때 태어난 아들이 이삭(יִצְחָק yits-chaq)이다. 이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전부였다. 삶의 목적 그 자체였다.


창세기 16장에서 그의 아내 사라는 자기만의 방법으로 자녀를 가지려고 한 적이 있다. 

야훼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창 16:2)


중요한 건, 사라가 이 제안을 하기 전에 야훼는 여러 차례 사라를 통해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마치 창세기 3장에 아담이 하와의 말을 듣고 금지된 열매를 먹은 거처럼 이번엔 아브라함은 아내의 말을 듣고 이집트인 여종 하갈(הָגָר "이방인"으로도 의역 가능)과 관계를 가져 이스마엘(יִשְׁמָעֵאל "신은 들으신다")이 태어난다. 17장으로 넘어오면 아브라함은 이미 이스마엘을 자기 후계자로 확정시켜 놓은 듯하다. 그때 야훼가 그 앞에 나타난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אֶל־אַבְרָם el-shaddai)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 


'넌 내가 자식 못 줄 거 같아?' 신에 대한 신뢰관계를 깬 종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다.  시간이 지나 야훼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할 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엄중한 실수를 저질렀는 지 깨달은 거 같다. 이 외에는 그의 행동이 설명이 안 된다. 신의 뜻을 거역하거나 그와의 신뢰를 깨뜨리는 죄의 삯은 죽음이다. 그런데 아브라함 상황에서, 아들만 무사할 수 있다면 그는 감사하게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포인트다. 지금은 그가 죽는 거보다 아들을 잃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있어 진정한 죽음인 것이다. 야훼와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이 방법 밖에 없다는 걸 너무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다. 


자신도 너무 명확하다가 이해한 건지 아브라함은 단 한 번도 신이 왜 이런 걸 요구하는지 질문하지도 않는다. 바로 다음 구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창 22:3) 이삭과 출발한다. 이동 중 이삭이 뭔가 이상하다는 눈치를 챘는지, 아버지에게 질문을 한다. 

아버지여...(중략)...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 22:7) 


이 와중에도 아브라함은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한다. 

내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 22:8)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저 문장 안에 얼마나 많은 의미와 감정이 실려있는지 몸에 와닿는다. 이삭이 바로 그 어린양이다. 야훼가 친히 지목한 어린양. 바로 다음 9절, 보면 목적지에 도착하고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았다. 드디어 운명의 순간이 왔고, 아브라함은 하나뿐인 아들의 피를 흘리기 위해 칼을 들었는데 그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그를 막는다. 


천사가 아브라함을 막는 순간을 그림으로 남긴 렘브란트(출처: 위키백과) 


그 순간,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 마침 수풀에 걸려있는 숫양을 발견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대신해 번제로 드린다(22:13). 그리고 야훼는 천사의 입술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창 17:22)


저 짧은 구절 안에 진정한 '하나 됨'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가인과 아벨 일화에서 봤지만 인간은 죄와 죽음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순 없다. 누군가가 반드시 그 삭을 치러야 한다. 이건 철저히 신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히브리 성서에서 은혜(חֶ֫סֶד, chesed)란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베푸는 사랑이다. 야훼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준 것처럼. 


하지만, 신이 아무리 인간을 구원하기 원해도 인간이 먼저 자신이 어떠한 세상에 살고 그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이해하지 않고, 또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다. 인간은 평생 고되게 생존만 하다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아벨의 경우를 통해 우리의 상태(the Human Condition)를 정확하게 인지해야 하지만, 이는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건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걸 포기하는 것과 동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신이 아브라함에게서 그의 소중한 아들을 빼앗지 않았다는 점이다. 17장 22절, 그리고 아벨 번제를 얼핏 보면 구원은 올바른 행위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오해할  있다. 절대로 아니다.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전달한 큰 복과 번성에 대한 약속은 이미 야훼가 그를 선택하고 불렀을 때부터 약속된 것(창 12, 창 13, 창 15, 창 17)이다. 신과의 관계는 철저히 신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다만, 그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태도와 행위가 있는 것이다. 


속죄의 의의

유대인 남성들이 할례를 하는 것도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성기에 칼을 대 상처를 남김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생식기나 능력을 번성하는 게 아니라, 철저히 야훼의 능력에 의지하겠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자녀가 없을지라도 그가 받은 사명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에게 오히려 자녀를 주는 것처럼, 히브리 성서는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저것만 있으면 내 인생이 풀릴 거 같은 본질적인 필요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가르치는 듯하다. 우리가 누군가가를 건강하고 온전하게 사랑하기 위해선 내가 먼저 홀로서기를 잘할 수 있어야 하는 거처럼. 


나로부터 요구되는 것, 필요한 것이 너무나 많은 오늘날, 한 번쯤 멈춰 서서 고민해 볼 만한 것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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