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론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
오늘 소개할 문헌은 소크라테스의 가장 유명한 명언 중 하나가 등장하는 작품인데, 바로 플라톤이 기록한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철학, 특히 서양철학에 입문하기 원하거나 서양고전을 읽어보고 싶은데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강력히 추천하는 가장 큰 이유는 플라톤의 작품 중에 가장 짧고 내용이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물론 분량이 짧지만 이 글이 던지는 질문 하나, 하나가 독자를 생각하도록 멈추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글은 왜 읽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에피쿠로스, 심지어 기독교, 칸트. 헤겔, 플라톤 뒤에 등장한 모든 철학과 사상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이나 첨언(footnotes)에 불가하다고 표현할 정도다. 사실, 플라톤주의, Platonism이 뭔지 한 문장에 설명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국가론과 같은 더 길고 유명한 그의 작품을 보면, 플라톤은 자기만의 사상이나 이상을 받아들이도록 독자를 설득시키기보단 다양한 철학적 주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대부분 플라톤의 작품은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과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자신의 글에 주인공으로 등장한 스승의 입을 빌려 자기 철학을 전달하기도 하면서 함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 때문에 독자도 자연스럽게, 연극을 보듯이 논리를 따라가 철학적 사고를 연습할 수 있다. 플라톤의 제자 이리스토텔레스도 "소크라테스의 변론"도 이런 논리를 배우는데 유용한 도구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Ἀπολογία Σωκράτους 'Apologia Socratus, 이하 "변론")은 사실 "대화록"라고 보기는 어렵다. 소크라테스를 제외하고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원고인 중 하나인 멜레토스만 대사가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장면을 기록한 글이다. 희랍어로 'apologia'가 영어의 'apologetics'(변증학)의 어원이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스스로 독약을 마셨다는 일화는 기억하고 있지만 애초에 왜 법정에 가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스파르타와 펠레포네소스 전쟁(431~404BC) 말기, 스파르타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많은 일부 아테네 시민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소수 엘리트에 의한 통치제인 과두제 정부를 설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패전 직전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 정권이 재설립되는데, 당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 과두제 정변에 일조한 자들이 있었다. 아직 전시 상황이라 쿠데타에 일조한 시민들을 체포하고 재판하지 못했지만 종전 후 상황은 달라졌다.
소크라테스는 기존 올림포스 신들을 부정하고 다른 신들의 숭배를 주장하고 아테네의 젊은 세대를 타락시킨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재판장에 출석한 배심원들에게 자신의 혐의를 하나씩 다루면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한다. 또, 자기를 기소한 자들의 말을 비꼬고, 심지어 패러디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적 소신을 논리적이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소크라테스가 때론 재미있으면서, 흥미롭기도 하고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대단하다 느껴지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친구가 고대 그리스 최고의 성지인 델포스의 아폴론 신전에 찾아가 거기에 있는 예언자에게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가 있냐고 질문한 일화를 전하는데, 아폴론의 예언자는 없다고 답했다. 자신이 왜 지혜로운지 고찰하다가 자신은 아는 것이 없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결론을 내리는 유명한 일화다. 자기 지혜를 과시함과 동시에 무신론주의자는 결코 아니라고 변론하는 재미있는 일화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가르치면서 신들을 부정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국가가 기존에 믿었던 신이 아닌, 다른, 새로운 신에 대한 믿음을 전파(οὓς ἡ πόλις νομίζει, ἕτερα δὲ δαιμόνια καινά)했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재판에 출석한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를 무신론주의자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실제로 두 혐의를 모두 받은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에게 입장을 분명하게 하라고 한다. 내 죄는 다른 신을 전파한 거냐, 무신론이냐? 원고는 무신론이라고 답한다(26c).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인간을 부정하면서 인간의 행위를 논할 수 없듯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는 신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행위를 논할 수 없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정통 신을 이야기하든 또 다른 신을 전파하든 그는 무신론자는 아니다.
더군다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신에 대한 봉사로 묘사하고 이보다 더 큰 아테네에 대한 축복이 없다고 주장한다(30a). 여기서 신은 그를 가장 지혜로운 자로 지목한 아폴론인 거 같은데, 그를 사형시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성모독이 아니냐는 논리를 펼친다.
ὦ ἄνδρες Ἀθηναῖοι, πολλοῦ δέω ἐγὼ ὑπὲρ ἐμαυτοῦ ἀπολογεῖσθαι... ἀλλὰ ὑπὲρ ὑμῶν, μή τι ἐξαμάρτητε περὶ τὴν τοῦ θεοῦ δόσιν ὑμῖν ἐμοῦ καταψηφισάμενοι.
아테네 시민들이여, 이제는 저를 변론할 것이 아니라.. 그대들이 신의 선물인 나를 홀대해 죄를 범하는 걸 방지하려는 것이오(30d~30e).
"변론"을 천천히 읽다 보면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도대체 왜 재판을 받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데, 그가 아테네의 젊은 세대를 타락시킨 정도가 아니라 파괴시켰다고(διαφθείρω) 지적에 대해 특히 답답해하는 거 같다.
이쯤에서 아테네의 법정에 대해서 이해를 좀 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배심원은 무작위로 선별된 50명의 아테네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아테네 도시 국가, 민주주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스승의 변론을 한 국가 전체를 위한 메시지로 재해석하고, 민주주의, 정의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 중에도 그의 제자들이 와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34a부터는 법정 시스템 자체를 회의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 아테네 기득권들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온 거 아니냐, 분명 여기 있는 자들은 자기가 피고였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비꼰다.
οὐ γὰρ ἐπὶ τούτῳ κάθηται ὁ δικαστής, ἐπὶ τῷ καταχαρίζεσθαι τὰ δίκαια, ἀλλ᾽ ἐπὶ τῷ κρίνειν ταῦτα: καὶ ὀμώμοκεν οὐ χαριεῖσθαι οἷς ἂν δοκῇ αὐτῷ, ἀλλὰ δικάσειν κατὰ τοὺς νόμους.
배심원은 정의로운 일을 부패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정의와 부정을 올바르게 판별하기 위해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오; 배심원은 자신의 의무에 합당하지 않은 발언은 삼가고 오로지 법에 의해 판단하기로 맹세했소(35c)
여기서 일반적으로 "말하다"로도 해석되는 kariestai(χαριεῖσθαι)는 선의, 은총 등을 의미하는 karis(χαρις)의 동사형인데, 말 그대로 선의를 베푼다는 뜻이다. 정의는 재판의 결과를 판거름할 수 있는 배심원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는 피고가 불쌍하거나, 자신에게 이득이 있을 것 같은 자에게 베푸는 선의가 아니다. 오로지 법을 기준으로 판결을 내려야 진정한 정의가 실현된다. 그러나 지금 재판장에서는 정의가 부재한 듯하다.
μοι δοκεῖ εἶναι δεῖσθαι τοῦ δικαστοῦ οὐδὲ δεόμενον ἀποφεύγειν, ἀλλὰ διδάσκειν καὶ πείθειν.
저는 배심원에게 의지거나 이 상황을 모면하는 건 옳지 않소. 오히려 배심원을 가르치고 설득시키겠습니다(35c).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배심원을 필요하지 않겠다는 건 이들이 원하는 대로 아첨하거나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는 철학자로서, 아테네의 시민들인 배심원들에게 진정한 정의를 교육하겠다고 발언한다. 그러나 이 발언으로 그에게는 유죄 판결이 내려지고 멜리토스는 사형 선고를 주장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만큼 당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문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변론" 초반으로 되감기 하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 활동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면 죽을 운명이라는 걸 알고 트로이의 전장으로 뛰어든 영웅 아킬레스와 비교한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건 지식이 없으면서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왜냐, 소크라테스 자신은 사후세계에 뭐가 있는지 모르고 그것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모든 철학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주제도 슬며시 내던진다. 흥미로운 점은 소크라테스는 육체적 죽음을 전부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테네는 직접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토의와 공적인 모임에 참가하는 걸 중요시했다. '시민답게 행동하다' 혹은 '공회에 참석하다'(πολιτεύω, politeo)라는 동사가 있을 정도였다. 반대로 개인 활동을 하거나 은둔 생활하다는 'idioteo'(ἰδιωτεύω)는 영어로 "바보"를 뜻하는 'idiot'의 어원이기도 하다. 한창 정의에 대한 논리를 펼쳐나갈 때 인간은 진정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자리에 올라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32a).
이 구절 가운데 "그가 짧은 기간이라도 생존하기 원한다면"(εἰ μέλλει ὀλίγον χρόνον σωθήσεσθαι)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어쩌면 (플라톤이 그린) 소크라테스는 어리석은 군중들에게 휩쓸려 자신의 소신, 진리를 잃은 상태가 진정한 죽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기까지 일체 흔들림 없이 자신의 철학을 꿋꿋하게 주장할 수 있었던 동기였던 걸 수도 있다. 이 맥락에서 소크라테스의 그 유명한 명언이 등장한다.
ὁ δὲ ἀνεξέταστος βίος οὐ βιωτὸς ἀνθρώπῳ
고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32a)
보통 "반성"이라고 해석되는 희랍어 단어(anexetastos)는 문자 그대로 "검증되지 않은", "아무런 고민을 받지 않은",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당연시 여기는 삶을 살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으로 사고하고 되돌아보지 않는 삶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사이에 배심원들은 최종 투표를 하고,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 듯하다.
νῦν ἐγὼ μὲν ἅτε βραδὺς ὢν καὶ πρεσβύτης ὑπὸ τοῦ βραδυτέρου ἑάλων, οἱ δ᾽ ἐμοὶ κατήγοροι ἅτε δεινοὶ καὶ ὀξεῖς ὄντες ὑπὸ τοῦ θάττονος, τῆς κακίας.
저는 느리고 늙었지만 보다 느린 죽음에 의해 붙잡혔소, 그렇지만 똑똑하고 정신 맑은 제 적들은 죽음보다 빠른 악에게 붙잡히고 말았군요(39b).
그는 비록 죽음을 곧 맞이하겠지만, 소크라테스를 법정으로 끌고 온 멜리토스를 비롯한 적들은 죽음보다 더 끔찍한 악(μοχθηρίαν) 그리고 부정(ἀδικίαν)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그들에게 역으로 사형 선고를 한다. 죽은 소크라테스와 삶을 이어갈 그의 적들 중 누가 더 행복할지는 신의 뜻에 맡기면서 "변론"은 끝이 난다.
간혹 소크라테스를 예수에 비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만큼 소크라테스 하면 "소신"을 빼놓을 수 없을 거 같다. "변론"을 처음 읽었을 때, 소크라테스가 배심원들에게 꿋꿋하게, 논리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서 전하는 모습이 정말 멋지기도 하면서, 내가 추구하고 있는 삶의 가치를 저렇게 소신 있게, 용기 있게 대변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모두가 내가 믿는 신념 때문에 나를 핍박하고, 모함하고, 죽이려고 들 때, 우리는 과연 죽을 가치가 있는 걸 지키기 위해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