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영문학과 출신인데, 첫 전공 수업을 듣던 날, 한 학기 동안 공부하게 될 작품들이 수록된 요강을 받았다. 거기에 베어울프, 실낙원과 같은 서사시는 당연히 보였고, 셰익스피어의 주요 비극과 희극들도 말이 필요 없었다. 그런데, 웬만한 일반인도 알아볼 영국의 고전들 사이에 킹 제임스 성경도 포함되어 있었다.어째서 성서, 정확히 말하자면 성서의 한 영어 번역본이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문학 전공생이 반드시 공부해야 할 문학작품에 포함된 건가?
성서가 현재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지 별도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여러제국을 세우고 또 무찌를 수 있는 희망을 불어넣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꾼과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준 책이다. 성서는 아직까지도 전 세계 많은 이들의 삶의 모습, 그리고 사고방식에도 상상 이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사실 온라인 상에서 특정 종교의 경전에 대한 글을 올리는 거 자체가 분명 적지 않은 어그로를 부를 수 있는 행위이다.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성서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을까? 이 책이 21세기 한국인들과는 무슨 상관일까?
인류는 불가능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작은 아이디어 하나만으로도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고, 버튼 하나면 내 눈앞에 음식이 나타나고, 불치병을 치유하고 새로운 피조물까지 창조해내는 경지까지 도달했다. 롤플레잉 게임처럼 우리가 필요한 그 어떤 것도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꽃은 부패하고 죽어버린 다른 가치들을 토양 삼아 자라나고 있다. 인간은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서 언제, 어디서든 미디어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핸드폰으로 재생하는 한 편의 영화가 한 작가의 영감부터 완성될 때까지 어떤 과정과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지하철 이동 시간을 때워주는 유튜브 영상과의 가치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자녀가 없지만, 내 아이가 배달 어플로 주문한 햄버거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누군가가 소를 키우고 또 다른 사람이 채소들을 필요한 시간만큼 기다려가면서 키웠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음식은 그저 스마트폰의 또 하나의 기능으로만 인식될까?
성서의 도입부라고도 할 수 있는 창세기라는 책에 유명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다. 아담과 이브가 때로는 지식, 앎의 나무("Tree of Knowledge")로도 불리는 선악과를 따먹을 때 마귀는 이들이 신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한다. 과학으로는 더 이상 정복 못할 분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의 유혹 앞에 선 인류의 모습과 같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인류의 역사를 보면 실제로 과학은 오랜 기간 금지된 열매, 금기시된 영역이었다. 물론 과학을 통해 생명을 구할 수도 있고, 삶의 질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진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동시에 AI, 로봇, 유전자 복제 등 윤리적인 문제로 도마에 올랐던 수많은 분야도 이제는 인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있다. 과학자, 기술자,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며 이 열매를 손에 넣었고 앞으론 더 많은 성과가 분명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능케 한 실리콘밸리의 IT업계 거장들, 그리고 유발 하라리와 스티븐 핑커 같은 석학들도 인류가 과학을 신뢰하면 노동도, 아픔도 없는 아름다운 유토피아가 완성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신을 만들었을 때 역사가 시작되었고, 인간이 신이 될 때 역사는 끝날 것이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만든 저 문구는 과학이 열어준 인류의 밝은 미래에 대한 예측으로 지은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부정하는 무신론자부터, 무관심자, 광신도마저도 한 번 즈음은 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학기술로 인간은 신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정말 신이 된다면 우린 행복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과 지식인들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바로 고객이 배달 어플로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선 여전히 누군가가 그 음식을 생산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플랫폼으로 영웅과 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이보다 노동이라는 족쇄에 묶여있을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그 어떠한 프로그래머나 AI 전문가도 이 목적과 존재 가치를 상실하여 도태될 위기에 놓인 수많은 인간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든, 모든 인간에게 유발 하라리의 예언이 현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는 이와 무슨 상관인가? 학계에서 철저하게 무시되기 전 성서와 그리스 로마 신화, 즉 인문학이 교육의 중심에 있었다. 사실 인문학이 곧 교육이었다. 지금 교육은 새로운 가치의 창출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원래 교육은 자연, 문학, 그리고 인간 등,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숨겨진 가치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플라톤의 글들이 수백 년 동안 대학에서 읽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성서의 세계관, 성서의 문화와 관점을 해석하고 고민하는 글들을 집필할 것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전 문헌인 성서가 담고 있는 세계관, 내러티브와 윤리를 알아가면서 인간의 참된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현대인이 꼭 알았으면 하는 성서의 구절이 있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성서의 내러티브의 가장 큰 아이러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신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먹었지만, 신은 이미 인간을 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고귀하고 그 어떠한 것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존재이다. 성서의 모든 가르침을 모든 사람이 기쁘게 받아들일 수는 없어도, 이 책과 그 세계관을 알아가는 시간이 최소한 인간의 참된 가치를 발견해 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