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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 Jul 21. 2020

일상으로부터의 탈옥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이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81-82쪽)


 
지난 겨울,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기 직전 여행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군 입대라는 개인적 중대사를 앞두고 “후회 없이 재밌게 놀았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던 이유에서일까.
 
타국에서 며칠간의 짧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최저임금 선의 알바를 몇 주간 꾹꾹 참아가며 문득 생각했다. “방에 누워서 초코칩 하나 까놓고 넷플릭스보는게 더 큰 행복아닐까? 일면식도 없는 남의 나라에서 며칠 지내다 오는게 나에게 그리도 중요할까?” 그렇다. 생각해보면 여행은 인간 자신들의 생존에 전혀 이롭지 않은 활동이라는 점에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다. 적응되지 않는 환경,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등 오히려 생존에 위협을 주는 요소들 투성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여행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DNA가 있을 것 같다는 무책임한 설명이 가장 설득력있어 보일 정도이다. (이제와 보니 나라는 게으른 인간에게 아침 알바는 무리였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될 것을, 여행하는 인간 사회를 폄훼할 것까지 있었나 생각이 든다.)
 
그때의 그 작은 고민으로 집어들게 된 『여행의 이유』는 내가 알고 싶었던 여행의 이유를 단박에 깨우쳐주었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현실에서 원효대사 해골물 같은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잘 일어나지 않으니 지금까지 전설처럼 전해내려 오겠지.) 책을 통해 여행이 없는 일상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왜 고통받는지를 알게됐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여행이 즐거운 이유가 아닌 일상이 고달픈 이유를, 왜 여행을 찾는지가 아닌 왜 일상에서 벗어나려 하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이다.



“ ‘여행’은 아마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했을 것이다. (···)
 일상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해야 할 일들, 그러나 미뤄두었던 일들이 쌓여간다. 언젠가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들이다. (···) 우리는 뭔가를 하거나, 괴로운 일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 떠나면 그만이다. 잠깐 괴로울 뿐,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이다.”
(203쪽)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점철된 일상에서 벗어나 오직 ‘현재’를 마주하고자 한 시간적 탈출. 하지 못한 것과 해야 할 것이 서려있는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오직 ‘낯선 장소’를 걷고자 한 공간적 탈출. 여행은 그저 일상시간과 일상공간으로부터 도망치는 이중의 탈출을 인간들이 멋들어지게 표현한 것 아닐까.
 
여행이 그저 자신을 괴롭히는 시공간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임을 깨닫는게 썩 불쾌하지만은 않다. 요즘 세상 같이 우리의 능력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일상을 자주 맞닥뜨릴 때에는, 또 그 일상이 내 자아를 집어삼킬정도로 무겁게 느껴진다면, 인간이 별 수 있겠는가. 늘 그래왔듯 “뭐 방법이 없지” 한마디 유유히 던지며 여행이란 이름의 도망을 선택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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