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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 Nov 08. 2020

3호선 그리고 게으른 뇌 : 정재승<열두 발자국>

오늘도 내일도 출퇴근을 반복할 현대인과 그들의 뇌를 위하여


"사람들은 중식당에서 음식을 고를 때마다 뇌를 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가장 빠르고 편한 경로를 찾기위해 매번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습관의 힘'입니다. (...) 뇌를 쓰려면 많은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되도록 습관적인 선택을 통해 인지활동에 에너지를 쓰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138쪽)


고속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내린다. 33번 플랫폼에서 약 500미터를 걸어 에스컬레이터를 두번타고 지하로 내려간다. 두번의 좌회전을 거치면 주황색 3호선 열차가 들어선다. 이대로 약수까지 가서 6호선으로 갈아타면 되겠지. 5-4칸 위에 서있으면 더 뻘리내릴 수 있을거야. 서울 상경 3년차. 수없이 오고가며 이제는 점심시간 메뉴 고르기보다 익숙해진 길 위에서 불현듯 뇌리를 스친 한 의문. 내가 탄 3호선 열차는 대화행이었나, 오금행이었나? 어림잡아 수십번은 넘게 오고갔을 그 길 위에서 놀랍게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었다. 나에게 그 열차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 열차가 천재지변이 없는 한 내가 환승해야 할 약수역까지는 간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됐던 것이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복잡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성실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31가지 맛을 고를 수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도, 형형색색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는 옷가게에서도, 수두룩 빽뺵히 차 있는 카카오톡 친구들 중에서도 비슷한 선택을 반복한다. 우리 뇌의 본성적 게으름은 30개가 넘는 아이스크림 중 단 여덟 종류의 아이스크림이 80% 넘는 점유율을 차지하게 하고, 우리 옷장을 비슷한 색상의 옷만으로 가득 넘치게 하며, 카카오톡 개발자로 하여금 채팅방 즐겨찾기 기능을 만들게 한 것이다.


이러한 양태를 저자는 '삶의 진폭'이라고 표현한다. 시간이 흐르고 문명이 발전할수록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넓어졌지만, 우리는 그 모든 가능성들을 다 경험하며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뇌에서 기인하는 우리의 본능은

과거의 경험이라는 잣대로 무난했던 것, 편했던 것, 안정적이었던 것을 추구하며 이는 곧 '습관'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다. 인간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죽어간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시간이 지나며 본능적으로 삶의 진폭을 줄여나가는 인간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다.


수십번 탄 이 전철의 방향을 알기 위해 수백번 들었을 안내방송에 처음 귀기울였을 때, 열차 좌측 끝 노인분들이 열변을 토하며 정치평론을 이어가는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나이가 들수록 나와 다른 생각, 성향, 경제적 배경 등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점점 회피하는 인류의 단면을 목도하는 듯했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해가 지남에 따라 조금씩 삶의 진폭이 좁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기에, 그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적잖이 씁쓸했다.


 "새로고침을 신경과학적으로 해석해보면 나쁜 습관, 뻔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입니다. 나와 다른 분야에 있는, 다른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을 만날 가능성은 점점 적어집니다. 불편함을 견디면서 새로운 사람과 이야기하는 걸 즐기면서 살지 않으면, 내 삶에 새로운 생각이 유입되는 일들이 점점 줄어들 것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144쪽)


우리 뇌의 해태를 그저 넋놓고 지켜만 보고 있기에는 우리가  속에서 바꾸고 싶은 습관들이 너무나 많다. 단지 바꾸고 싶은  뿐만 아니라, 우리가 통해 증명해낼  있는 것도   없이 많음을 안다. 그저 그래왔던 것처럼 뇌가 지배하는 습관에만 몸을 맡겨둔다면, 익숙한 최단거리 경로에 올라타 스마트폰으로 SNS 보고 음악을 들으며 내가 내려야할 곳만이 중요할  자신이  열차의 방향조차 신경쓰지 않는 승객이 된다. 열차의 방향을 고민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나와 같은 열차에  이들이 어디를 향하는지, 나와 다른 목적지를 바라고 있다면  그런 것인지 관심갖고 이야기 나누는 것은 지구라는 같은 열차에  우리 승객들의 공동의무일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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