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로만 알고 있는
어릴 때에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언어적으로 정확히 그렇게 표현하지 않더라도 사고의 패턴에서 그런 면이 자주 보이지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내가 행복해하면 주변이 응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아픔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물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픔을 중요합니다. 아주 약하고, 또 민감하며, 무척 중요하죠.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기는 어렵습니다. 어릴 적 받았던 상처가 오래 가는 것도, 어릴 때에는 ‘나’가 세상의 전부이기 때문이겠지요. 점 하나 찍힌 쭈글쭈글한 풍선이 부풀어 오르면 그 점도 쑥쑥 커지는 것처럼요.
하지만 나이를 먹다 보면 점차 주위를 둘러보게 됩니다. 겪은 일도, 아는 사람도 많아지고 뇌 역시 발달하게 되며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지요. 그러다보면 제가 가진 상처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그간 작은 상처를 너무 부풀려서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혹은 작은 상처에도 저토록 힘들어 하는데 내가 그를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아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나이를 먹고도 자신의 상처가 제일인 것처럼 아는 것은 슬픈 일이지요. 그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도 잠시, 일주일 한 달이 지나도 같은 말을 하는 사람 옆에 버텨주는 사람은 얼마 없더라고요. 살면서 그런 경험이 한 번 즈음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면 사람들과는 멀어지고 맙니다.
자신의 상처가 자신만의 상처임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힘들다는 것은 내가 힘들다는 것일 뿐이지 남이 그에 동조해줄 필요는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힘든 것은 그저 힘들었다는 것인지 무언가를 한 게 아니라는 것. 힘들었다고 해서 인문학이나 예술을 더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왜냐하면, 그 힘든 것은 ‘내가’ 힘든 것이니, 다른 사람이 공감하고 이해할 논리적인 구성을 갖춘 것이 아니라는 것….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이런 과정이 포함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허탈한 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저 삶의 양식 중 하나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나를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위로해주지 않은 것에 원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누구도 위로해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위로를 받았을 때 큰 감동을 받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은 같은 일을 얼마나 따뜻하게 바라보느냐에 달려있으니까요.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면 원망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자신 속에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슨 말이라도 공감하고 이해하며, 늘 옆에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이는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의탁하는 꼴이 되어 버리죠. 누군가 떠나가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은 ‘나’로 인해 결정되었다고 생각하니까요. 자기 안에 갇혀있자 역설적으로 남들에게 의존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삶을 당당하게 만들어 줍니다. 가끔은 자신이 짊어진 것보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감사함과 겸손함을 배우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