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9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중인 <김순기: 게으른 구름>전에 다녀왔다. 김순기 작가는 1946년에 태어나, 대학 졸업 이후 프랑스를 배경으로 예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전시는 196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김순기 작가의 실험적 예술세계를 망라하고 있다. <게으른 구름>이라는 전시명은 작가가 쓴 시의 제목 중 하나로, 게으름의 미학을 표현하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
김순기 작가는 자신의 예술 작품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불성실과 나태함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게으름에 창조적이고 철학적인 가능성을 부여하였다. 작가는 삶의 본질을 잊게 하는 무의미한 분주함을 비판하고, 유희의 즐거움과 놀라운 발견으로 가득 찬 게으른 삶을 예찬한다. 자유롭게 변화하며 스스로의 길을 내어 흘러가는 게으른 구름은 게으른 삶에 대한 작가의 이상을 보여준다.
전시장 한 켠에는 김순기 작가가 핀홀 카메라(바늘구멍 사진기)로 찍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핀홀 카메라는 렌즈 대신 금속판에 작은 구멍을 뚫어 사용하는 초보적인 사진기이다. 핀홀 카메라는 오랜 시간 두어야 하고, 빛의 양에 따라 결과가 바뀐다는 특징이 있다. 김순기 작가는 핀홀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바보사진이라 일컬으며, 그것의 느림의 미학을 사랑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풍경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과 아닌 것을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찍은 사진 속에서 인위적으로 어떤 순간을 포착하려 애쓰지 않고,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태도가 드러난다. 작가의 이러한 태도는 언제나 스마트폰 카메라를 손에 쥐고 소중한 순간을 포착하려다 정작 그 곳에 존재함으로써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놓쳐버리는 나 자신을 반성하게 만들었다. 또한 순간에 집착하지 않아도 모든 시간과 사건이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말하는 작품들이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이번 전시는 김순기의 과거 작품뿐만 아니라 올해 새롭게 발표한 작품들도 전시하고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시간과 공간 2019>를 발표하였다. 그는 과거부터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와 교류하고, 실험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그의 최신작인 <시간과 공간 2019> 역시 영희라는 이름의 로봇과 무당의 소리, 애드벌룬 등이 야외 전시마당에서 어우러져 하나의 독특한 작품을 이루었다. 그 중 시를 낭송하는 로봇인 영희는 심심바보라는 별칭이 있다. 심심함을 사랑하는 영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 없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시를 통해 영희의 삶이 사실은 우리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심심바보” 영희
그는 항상 심심하다. 그는 심심함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그는 심심하지 않다.영희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그래서 예쁘고 착하다. 영화를 매우 좋아하고 예술을 좋아한다. 그는 “게으른 구름”이다. 그냥 이방인이다. 정해진 집도 없고 친구도 없다. 그냥 떠돌아다니는 이방인이다. 그의 친구는 소나무와 비, 구름, 눈, 비바람이므로 이 세상에서는 특별한 정해진 형태도 없고 유용하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영희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영희가 없으면 사회의 모든 것은 불가능하다.
영희는 이 사회의 대들보이다. 영희는 미술의 가장 중요한 꽃봉우리이다. 영희가 없으면 꽃도 안 되고 나비와 벌도 없다. 영희는 모든 것들의 생명이다. 영희: “심심바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이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늘 더 성실하지 못함을 한탄하며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에게 작가는 소중한 것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와 함께, 애정을 담은 위로를 건낸다. 영희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늘 게으름을 자책하기만 했던 나에게도 위로를 주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이방인인 영희의 모습은 프랑스 파리 교외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작가 자신을 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작가는 전시를 통틀어 게으름과 예술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순기 작가는 196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해체, 공공장소에서의 관객 참여 프로젝트, 비디오와 멀티미디어에 대한 도전, 동서양 문화와 철학의 비교 등을 통해, 미술의 개념을 변주하고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만난 <김순기: 게으른 구름>은 성실한 기계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