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기행 - 로스앤젤레스 1
이럴 줄 알았어도 인간이 되었을까?
난 후회하지 않아. 그녀를 느끼는 게 영원히 사는 것보다는 나아.
영화 <시티 오브 엔젤>에서 내내 보여준 니콜라스 케이지의 눈빛은 세상 그 무엇보다 애절하다. 그 사슴 같은 눈망울 때문에 어이없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충분히 볼 가치가 있었으며, 영화의 배경으로 나온 로스앤젤레스도 덩달아 '천사의 도시'로 각인되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로스앤젤레스 땅을 직접 밟아보기 전까지는.
니콜라스 케이지 같은 메신저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닐 거라 생각했던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의 첫인상은 '그냥 남미'였다. 아무리 화산지대라 하더라도 서부 최대의 도시이자 뉴욕 다음으로 큰 미국 제2의 도시라는데 그 흔한 마천루조차 잘 보이지 않았고, 거리에는 니콜라스 케이지 대신 남미의 후손으로 짐작되는 히스패닉계 인종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여기가 진정 미국이었던가, 아니면 캘리포니아의 분위기가 원래 이런 건가...
근원을 따지자면 원래 멕시코 땅이었으니 히스패닉계가 월등히 많은 게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미국이니까' 하는 기대치가 있었다. 동부 제1도시 뉴욕을 거쳐 왔으니 서부 제1도시도 그럴 거라는. 하지만 로스앤젤레스는 그 후에 들렀던 샌프란시스코와 시애틀보다도 훨씬 낙후된 모습이었다. 2차 대전 이후 멕시코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이민자들이 몰려와서 다양한 문화 구역을 형성하고, 이에 따른 무분별한 도시 확장(Urban Sprawl)으로 도로 체계까지 얽히고설킨 아주 복잡다단한 도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로스앤젤레스는 머무는 내내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여기에는 캘리포니아 주 특유의 강렬한 햇빛도 한몫했는데, 태양이 어찌나 강렬했으면 '선키스트(sun kissed)'란 브랜드까지 생겨났는지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게다가 심각한 도로 정체와 체계적이지 않은 대중교통은 내게 '천사'와도 같은 인내심까지 요구했다. 할리우드가 심어놓은 스토리텔링의 힘은 여기까지인가...
그러다 로스앤젤레스의 기원을 더듬어가는 과정에서 문득 10년 전의 기억이 떠오르자 이 도시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2009년 여름, 퇴사와 함께 날아간 지구 반대편에서 나를 살아가게 해 준 건 바로 남미였으니. 한국에서 탈탈 털렸다고 생각했던 멘탈을 되찾을 수 있게 해 준 곳. 특별히 나쁜 사람들을 만나서 만신창이가 되었던 게 아니라, 내 앞에 다가온 환경과 인연들을 잘못 대했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졌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곳. 그 남미 여행의 마지막에 멕시코가 있었고, 로스앤젤레스는 바로 그 멕시코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18세기 스페인의 총독 펠리페가 이 도시를 창건했을 때만 해도 로스앤젤레는 'El Pueblo de Nuestra Senora la Reina de los Angeles del Rio Porciuncula'라는 아주 긴 이름의 도시였다. 직역하자면 '포르시운쿨라 강의 천사들의 여왕인 성모 마리아의 도시'인데, 이것저것 다 생략되고 지금은 천사(los Angeles)만 남았다. 그리고 그 천사의 도시가 시작된 곳이 바로 시청 근처에 있는 엘 푸에블로 역사 공원 (El Pueblo de Los Angeles State Historic Park)이다.
공원은 남미의 전형적인 중앙 광장의 모습을 담고 있다. 흡사 여기가 멕시코의 어느 마을이라 해도 믿을 만큼. 공원 안에는 로스앤젤레스 시의 건립을 추진했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와 총독 펠리페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 주위로 최초의 교회와 소방서, 호텔, 가옥들이 몰려 있어서 말 그대로 이 도시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시청에서 불과 몇 블록 안 되는 거리지만, 현대적인 그곳과는 대조적으로 이 일대는 철저하게 멕시코의 분위기를 존중해주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뉴욕 다음으로 가장 다양한 이민사회를 이룰 수 있었던 로스앤젤레스의 저력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인종과 문화 간의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이 도시는 차츰 융합하는 스킬을 배워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힘내시길, 천사의 도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