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는 나에게 매우 소중한 곳이다.
'카페'는 나에게 매우 소중한 곳이다. 90년대 후반에 태어난 필자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서울이 아닌 지방 광역시에도 스타벅스 체인점이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하고 있었다. 무려 중학생도 아닌 내가 스타벅스에 갈 수 있었던 요일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 가족들이 함께 외식을 했던 일요일이었다. 스타벅스에 가서 (당연한 소리겠지만) 커피를 마시도록 부모님이 허락해주진 않았다. 나에게 허락된 커피는 교회로 가는 차 안에서 부모님이 마셨던 믹스 커피를 한 두 모금 마시는 것이었다. 대신 스타벅스에서는 휘핑크림이 가득 올려진 '자바칩 프라프치노'를 마실 수 있었다. (필요없는 정보겠으나, 참고로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이제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교회를 굳이 여기서 언급하는 이유는 다음에 기고할 내용의 대표 주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라프치노 메뉴는 그때부터도 꽤나 비쌌던 음료였지만, 부모님은 그들 자신들도 모르게 자신의 아이에게 카페의 맛을 여덟 살 무렵부터 선사해주셨다. 어렸을 때 카페에 가면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거나, 가지고 온 책을 읽었다. 그 시절에 기억 속에는, 더운 날이건 추운 날에건 매장에 들어갔을 때 풍기는 카페 특유의 냄새 그리고 아늑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아마 그런 축적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나에겐 이제 카페란 '그 느낌과 분위기를 만끽하기 위해 마냥 좋은 곳'으로 각인되도록 만들었던 게 아닌가 싶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카페에 가기 시작했고, 편도선 이슈로 인해 목에 열이 많았던 나는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가 아닌 무려 '죽-아(죽어도 아이스)'를 주장하면서 아이스 커피를 주구장창 마시게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닌 아이스 라떼다. 혹자는 가려는 카페가 맛있는 곳인지를 알려면 아메리카노를 먹어보라고 하지만, 필자는 라떼가 그것에 해당된다고 굳게 주장하고 다니고 있다.
그 이유는 사실 민망할 정도로 단순한데,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 외에 추가된 것이 물밖에 없기 때문에 먹으면 공허하다는 것이다. 또한 나는 '그래도 밖에 나가서 무언가를 사먹으려면 물 말고 우유라도 첨가되어야 돈이 안 아깝지 않은가?'라는 고집 역시 가지고 있다. 사실 한여름엔 맑고 투명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제격이라는 점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맛있는 라떼의 기준에도 나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좋은 라떼의 척도란, 바로 '마시고 난 후의 입의 잔여감의 유무'이다. 우유가 들어간 라떼를 마시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입에 우유의 잔여감이 남기 마련인데, 왠지는 모르지만 좋은 라떼를 마시면 그 이후에도 잔여감이 없이 상쾌한 느낌이 남기 때문이다.
다시 카페라는 공간의 이야기로 넘어와서, 나는 20살 대학생 때 서울에 온 이후 지금까지 10여년 간을 육각형의 올라운더 카페를 찾기 위해 부단히-정말 부지런하게도- 수색하다시피 물색하고 다녔다. 정리해보자면, 내가 생각하는 지극히 '나'에 집중된 좋은 카페의 기준은 아래의 2가지이다.
1.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커피가, 그중에서도 라떼가 정말 맛있어야 한다.
커피가 맛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에 부응하기 위해, 그렇다면 '맛있는 커피'의 기준은 뭘까? 이것 또한 지극히 주관적일 것이다. 20대 초반의 필자는 커피란 자고로 무조건 고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대 초반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잠시 스태프로 일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거기엔 투썸플레이스가 박물관 초입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곳은 무려 원두를 고소한 맛과 산미있는 맛 두 가지로 선택할 수 있는 옵션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때 나보다 몇 살 많았던 한 아르바이트 동료는 나와 커피의 기준에 있어서 대척점을 두고 있었다. 즉, 산미있는 커피야 말로 맛있는 커피라고 나에게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그때는 내가 '산미와 커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기 주장이 강했던 시기였기에, 커피를 사먹을 땐 무조건 고소한 원두를 골라서 먹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날 카페를 갔을 때 산미있는 원두를 골라서 마셔볼까 했는데, 웬걸 '양립 가능한 것'이었다. 좋은 커피(라떼)의 척도로 삼고 있는 것인, 섭취 후의 잔여감은 산미있는 커피를 마셨을 때 더욱 남지 않고 입안을 상쾌하게 마무리하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웃기게도 현재는 원두를 고를 수 있다면 산미있는 원두를 골라서 마신다. 남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취향의 변화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생각한 것만이 맞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 그리고 세상은 내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만을 향유하며 살기에는 새로 경험해보아야 할 것들이 많다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던 것이다.
2. 공간이 아늑해야 하며 대화하기에도, 작업하기에도 좋은 (밀도의) 배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물론 1.과 2.는 교집합이지, 합집합이 아니다. 따라서 1.과 2.를 동시에 충족하는 곳을 찾는 것은 땅값이 비싸기 그지없는 서울 땅에서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1.을 충족하는 가게는 가게 안이 너무 협소하거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앉을 공간이 전혀 없는 가게가 부지기수였고, 세련된 디자인의 가게라는 미망 아래 거북목 증상을 극화시키는 카페 역시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2.를 충족하는 카페가 있는 반면, 1.을 충족하지 못하는 카페 역시 내 기준에는 정말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1.과 2. 모두를 충족하는 카페를 찾기 위해 핸드폰 지도 앱을 통해서 수시로 검색하기는 일쑤였고, 그 두 가지를 충족하는 귀한 카페를 가기 위해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부단히 그리고 당연히 사는 곳에서 먼 곳을 여행하듯이 가기도 부지기수였다. 엄마께서 하신 말씀인 '네가 번 돈은 카페에 다 쏟아붓고 있겠다'라는 말마따나 이제 가려는 위치의 카페들을 검색해서 카페 이미지와 리뷰, 그리고 메뉴 구성도의 세 가지 기준을 종합하여 직관적으로 비교해보면 어느 곳이 나의 두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인지가 짐작이 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하루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작년에 우연히 알게 된 현재 나의 최애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사진은 이번 설 명절에 대구 본가에 내려가 엄마와 팔공산의 한 카페에 가서 마셨던 커피를 찍은 것이다. 앞에 놓인 커피는 카페라떼, 그리고 뒤에 놓인 커피는 코르타도라는 스페인식 커피 음료이다. 이때 엄마랑 나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서로 가지고 온 책을 읽으면서(나는 다음 주에 기고할 글의 연재를 위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평화롭게 보냈다. 이 글의 제목에서도 써놓았던 것과 같이 카페가 나에게 주는 가치는 '맛'과 '공간'도 있지만, 또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효율성'이다. 효율성이라는 단어가 너무 정나미 없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조금 편안한 느낌에서 그것의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 또는 취미 등을 마음 편히 자신이 있는 그 공간 안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부디 이 말이 카페 영업을 하는 사장님들에게 슬픈 일이 아니길 바라지만, 필자는 작년 이맘 때 석사 졸업 논문을 거의 카페에서 썼다.
카페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잠을 일단 한 번 깨우고,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우연한 음악에 그날의 무드를 정하면서 하기로 계획한 일을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작업할 때 나는 행복감을 느끼는 것 같다. 도대체 이 카페라는 공간은 왜 이리도 나에게 좋은 감정을 들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여러 요소가 섞인 복합적인 이유이겠지만, 그것은 이 글의 말마따나 '커피의 맛'과 '카페의 공간'이 주는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덧붙여 나는 한 잔을 시키고 일정 시간이 지나서도 더 머무를 계획이면 한 잔을 더 시키고도 배가 고파서 디저트를 시키는 편이니, 부디 이 글을 읽는 카페 사장님들께서 뒷골이 서늘한 일이 없으시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