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모든 곳을 비춘다

단테 '신곡' 인문학 [도서]

by 윱인

어렸을 적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나에게 다양한 책들을 읽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초등학교 땐 동네 서점에 있는 온갖 만화책을 읽었다면, 중고등학생 때가 되서는 꽤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종류의 책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단테의 《신곡》이었다. 그때의 나는 이 책을 한 번 완독해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제대로 읽은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간이 많이 흐른 최근에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을 때도 나는 그것의 방대함에 놀라 소화를 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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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때 꺼내든 책이 바로 <단테 《신곡》 인문학>이다. 이 책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한번 고민해보려고 《신곡》을 펼쳐 들었으나 그 장렬함과 방대함에 놀라 책장을 닫으려 했던 이 시대의 모든 평범한 사람을 위한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16가지의 키워드를 각 장에 배치하여,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신곡》의 문장들을 인용하여 이해하기 쉽지만,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문장들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선, 《신곡》을 지은 단테라는 사람은 어떠한 삶을 살아갔던 인물이었는가? 그는 젊었을 적만 해도 피렌체의 고위 공직자로서의 탄탄한 벼슬길을 걸어갔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의 가도도 복잡한 정쟁에 휘말려 그는 이내 피렌체로부터 영구 추방을 당해 영원한 추방자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이때 《신곡》은 그렇게 추방당하여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지냈던 거처에서 꾼 꿈의 이야기를 집필한 이야기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가 건네준 길잡이를 발판 삼아 다시 읽은 《신곡》을 들여다 보면 볼수록, 단테가 (꿈속에서) 다녀갔던 내세의 세상이 인간의 현실 세상과 다르지 않구나 하는, 일종의 기시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어린 시절의 내가 어쩌면 나도 모르게 이 책을 계속 읽어 갈 수 있도록 흥미를 제공해주는 지점이 되었던 것이구나 하는 발견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시점에서 역순으로 그때의 나를 환기해본다. 나는 왜 《신곡》이라는 어려운 서적에 흥미를 느꼈던 것일까? 그것은 이 세상을 나의 지성으로 알아내고 싶다는, 패기가 넘쳤던 어린 시절의 지적 호기심에서였다.


나는 개신교를 믿는 집안에서 자랐기에, 종교와 관련된 카테고리는 나에게 자연스럽고 공기와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신앙심이 강한 집안에서는 그것에 반기를 들고 그리스도교 '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나는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창세기에서 온갖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이 나에겐 인간의 사고로 신을 형상화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악의 문제'였다. 그리스도교에선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보기 때문에,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신이 세상에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악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보고 있었다. 이러한 결론을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강한 부정은 마치 긍정과도 같다는 말을 여기서 꺼내는 것이 아주 알맞은 인용일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신에 대한 나의 그러한 부정적인 감각과 생각들은 그것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던지도록 나를 역동적으로 이끌었다. '왜 그런 것인지, 그게 맞는 것인지' 하는 등의 부정적인 생각들은 단순히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어떤 대상이 있으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고 숙고해보도록 하는 반성적 사고를 가지도록 나를 성장시켰다.


이러한 어린 시절과 그 부정적 감정을 연료 삼아 보내온 20대를 보내고 30대를 맞이한 요즘의 시선에서 다시 그때를 들여다보니, 그것 또한 나를 지탱하게 해준 축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은 마치 태양처럼, 내가 의식하지 않고 있지만 나에게 따듯한 햇살을 비춰주는 든든한 토대가 되고 있다는 점을 이제는 비로소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이 나에게 '해'와 같다는 것에 대해 좀 더 정확히 풀어 설명해보자면,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의식하며 살진 않지만 적어도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무의식적으로는 받아들이며 그것이 주는 긍정적인 가치를 인정하며 살아간다는 점을 의미한다. 인간은 해가 있다는 사실을 매일 의식하며 살지는 않지만, 그것의 존재로 인해 추위를 느끼지 않고, 낮과 밤의 경계를 구별하며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에 포섭되지는 않은 조금은 안타까운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교의 햇살은 나를 비추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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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엔 의식하지 못했지만 대략적으로 느꼈던 감각을 조금은 과장된 언어로 표현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 틀린 표현도 아닌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니 헤겔이 표현한 단테에 대한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천국에서 태양의 광채를 받으면서, 시든 꽃 위에도 날아다니는 나비와도 같다." 단테에 따르면,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과제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고, 인간이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나 같은 소위 유물론자들에게는 신의 세계 혹은 지옥과 천국과 같은 단어들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테의 진술은 여전히 유효하다. 단테는 세상에서 인간은 유충 상태의 벌레에서 성체 나비로 성장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는 비유를 든다. 인간은 길 위의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의지와 실천에 따라 완전을 향해 나아가려 성장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저자의 길잡이를 2차 도움 삼아 단테가 안내하는 구원의 길잡이를 따라 천국과 연옥 그리고 지옥을 간접 경험하게 된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인간이 되는 일은 되지 않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단테와 저자의 말처럼, 신의 궁극적 가치를 길잡이 삼아 성장하고 반성하며 실천하는 인간은 그런 한에서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음은 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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