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하기, 인식하기

소유하기, 소유되기 [도서]

by 윱인

[물건] '끝없는 갈망'



몇 달 째 마음을 끄는 가구가 있다. 그것은 바로 검은색 오픈 책장이다. 왜 사려 하느냐 묻는다면 사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월세로 거주하기에 온전한 '내' 집이라 부르긴 어려운 공간의 빈자리에 그 가구를 들여놓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면 되물어보자. 그 가구를 왜 그곳에 배치해야 하는가? 이것 또한 큰 별다른 이유는 없다. 가구를 배치한 뒤에는 그 위에 조명과 화분을 두어 그 공간을 꾸미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가구를 두는 목적은 또 다른 물건을 배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몇 달을 고민하다가도 이번 달에 필요한 생활비를 계산하곤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말이다. 이렇듯 물건의 속성이라 함은,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생활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어도 끝없이 무언가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3월을 기점으로 오래된 물건을 싹 정리해서 버렸다. 수납을 많이 하려고 침대 하단에 수납공간이 있는 서랍 침대를 샀었는데, 수납하려고 했던 내 결심이 무색하게끔 나는 신년을 맞이하여 낡은 짐들을 버렸다. 우리는 도대체 물건을 왜 사고 또 왜 버리는가? 이때 저자의 날카로운 생각이 나를 관통한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사는 걸까? 계속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계속 이 물건들을 더 좋은 물건들로 교체하면서?"


[집] '영속성이라는 환상'



월세로 거주하고 있는 집의 재계약 날짜가 임박해 있었다. 집주인이 별도로 고지하지 않아서 자연스레 월세가 인상되지 않고 재계약되는 것으로 넘어가는 것 같아 안심하던 찰나, 계약 만료 하루 전날 집주인으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왔다. 재계약에 대해 월세와 관리비 각각에 5% 인상 금액을 적용한다는 충격적인 통보를 받게 된 것이었다.


이제껏 만나봤던 집주인 가운데 가장 좋은 분이었지만, 하루 전 통보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주택임대차보호법을 찾아보니 과연 월세 인상 통보는 계약일 만료 6개월 전~2개월 전에는 통보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규정을 포기하고 집주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 집에 마저 안전하게 체류해야 할지, 규정을 제기했다가 주인과 관계가 틀어질지라도 작고 소중한 나의 월급을 지켜낼 것인지 순간 고민이 되었다. 결국 난 후자를 택했다. 결론적으로, 주인과는 다행히 원만한 합의에 도달했다. 관리비만 소액을 인상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만하면 괜찮은 집, 상식적인 집주인 그리고 동결된 월세'라는 요건만으로도 나는 불로소득자의 천국인 한국에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겼건만, 이 행복 혹은 영속성이 얼마나 집주인-의존적이었는가를 여실히 체감한 날이었다. 저자 율라 비스의 말처럼, 집이 제공하는 영속성의 환상은 그것이 실상은 가짜이고 허구일지라도 집은 나를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안전한 감각과 견고한 기반을 주는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노동] '위신의 지표': 자아실현이라는 신(新)노동



대학생 때 읽었던 한 페미니즘 저서는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물음에 명쾌하게 대답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말이다. 여성의 권리와 관련된 문제에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되어 1세대 페미니스트들의 글을 읽었을 땐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만 같은 짜릿한 해방감을 느꼈다.


하지만 2세대, 3세대 그리고 현재의 페미니스트 담론을 들여다볼수록 나는 명쾌함보다는 혼란스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지점은 바로 '교차성'이었다. 그것은 성별·인종·계급 등의 여러 정체성이 교차될 때 원래는 없던 차별 혹은 특권이 생기는 경우를 의미한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1세대 페미니스트인 버지니아 울프는 그러나 자본에 있어서는 유한계급에 속했다. 그녀는 여성들이 글을 쓸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백인 여성이었던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종속된 유색 인종 하인들의 고된 노동이 없었더라면 글을 집필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버지니아 울프처럼 글쓰기로서 소득이 생겼고, 비정규직을 전전하던 예전의 삶에서 벗어나 이제는 집도 있고 또 어떤 고급 식기를 살지 고민하는 위치에 놓인 자신을 여과없이 성찰한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은 바로 자본주의 내에서의 '자아실현'이라는 목적이 가진 한계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흔히 매슬로의 욕구 단계 이론에서 '자아실현의 욕구'는 최상위 단계에 있는, 그렇기에 추구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욕구다. 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현대의 자본주의 세계에서 일자리를 찾기는 더더욱 어려워지고 사람들은 더 불규칙한 생계 수단에 의존하고 있다. 저자는 그와 반대로 미국의 부자들이 일에 있어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실현에서 오는 충족감'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에겐 급여가 핵심적인 일의 동기가 아니며, 일이라는 것이 자신에게 '위신의 지표'인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이 바로 새로운 계급의 노동이다'라는 갤브레이스의 주장에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속마음이 들키고 말았음을 고백한다.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글쓰기의 일이 자신이 그렇게나 격렬히 피하고자 했던 중산층 계급, 나아가 갤브레이스가 주장한 '신계급층의 노동'이라는 점을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위치한 계급의 층위에 대해 인식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본주의 내에서 삶의 가치관과 태도를 재정립해보는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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