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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본 May 05. 2022

좋은 이야기, 나쁜 방향성



나에게는 예전부터 꽤나 특이한 역할이 주어져왔다. 중학교 시절부터 현재 성인이 된 지금까지 만나는 이들에게 고민 상담이나 혹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이 주어졌다. 자처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레 청취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는 진로 상담이나 학업 상담 혹은 연애 상담이 주를 이뤘고, 성인이 된 지금은 비전에 관한 상담이나 인간관계 혹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다. 


 초창기 청취자의 역할을 맡았을 때는 꽤나 기분이 좋았다. 그들이 나를 신뢰하고 그 분야에 대해서 조금은 더 아는 사람처럼 여겼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어깨가 불쑥 올라갔다. 하지만 점차 상담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조금씩 나도 모르는 새에 고통스러워졌다. 고통스럽다는 표현이 적합한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분명한 것은 상담이라는 자체가 나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많은 사람이 나에게 찾아오는 것은 명백히 기뻐야 마땅한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나는 그 의미를 소중하게 대했다. 하지만 큰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다. 점차 상담을 진행할수록 나에겐 자괴감이라는 대가가 따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사람이라고, 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 혹은 그들보다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의 방향성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졌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나의 자격에 대해 고민을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아마 내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고만 있는 자세를 취한 것은. 그들의 고민에 대해서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의 고민의 깊이가,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서 나는 쉽사리 결론 지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입을 닫고, 귀를 열었다. 초반에는 괜찮았다. 나는 편했고, 말하는 이들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토로했으니 둘 다 만족스러운 대화였다. 하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점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문제점은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나의 여자 친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저 자신의 감정을 알아달라는 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직접적인 해결방안이나 나의 의견을 듣고 싶어 했다. 물론 개중의 감정을 쏟아낼 곳이 필요해서 찾아온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이들은 나의 의견을 듣고자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금 고민을 했다. '도대체 나는 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전화 통화를 마치고 혹은 술자리가 끝난 후 어두운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고민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면서 나에 대한 객관화를 시작했다. 우선 남들이 왜 나를 찾아오는지에 대해 알아야 했다. '내가 무슨 모습을 보였길래 나에게 찾아오는가.' 이 질문의 대답이 나의 답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꽤나 많은 해가 저물었을 무렵 나는 이 부분에 대한 나를 정의 내렸다. 나는 스스로에게는 꽤난 정확하고 구체적인 신념과 확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예정된 정의였을지도 모른다. 중학생 시절부터 나는 나를 싫어했다. 나의 전체적인 부분에서 티끌만큼 작은 부분까지. 그 어느 하나도 좋아하거나 만족하는 부분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이 나를 객관화시키고 발전시키고자 생각하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나둘씩 나 스스로에 대한 법이 생겼고, 신념이 만들어졌으며 로드맵을 작성했다. 나는 이 부분이 남들이 나에게 찾아오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일단 답이 내려졌으니, 이제 이것을 행동으로 구체화시킬 방안을 찾았다. 그동안의 경험들을 떠올려보며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되뇌어봤다. 대부분은 그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각자의 상황에 맞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만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바꿨다. 나의 이야기를 하기로. 그들이 나의 의견을 물어본다면, 그들의 고민을 나의 고민으로 치환한다. 그리고 그 고민 상태였을 때 내가 할 행동에 대해 말해주기 시작했다. 꽤나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때때로는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게 의견을 적어 내렸다.


 반응은 좋았다. 물론 내 이야기를 듣고 침울해하거나, 깊은 생각에 빠진 이들도 더러 있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상태가 좋았다. 자기 객관화를 시작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는 점, 우리는 모두 삶의 주인공이지만 영화 속의 주인공은 아니라는 점. 냉정하지만 나다운 대답이었다. 어쩌면 나의 인생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에 찌든 20대 청춘의 이야기를. 그렇지만 그렇기에 자괴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남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남들의 감정에 맞추어 그저 듣기 좋은 이야기, 그들이 꿈속에서 못 빠져나오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이 그저 감정을 토로하고 싶은 건지, 의견을 묻는 건지 주제를 명확히 파악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을 권한다. 때로는 좋은 이야기가 나쁜 방향성으로 인도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청취자들에게 심심한 응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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