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즈 서울 2023'의 대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언론에 많이 소개된 것이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화가 안드레아 바카로(Andrea Vaccaro)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다. 영국 갤러리 로빌란트 보에나가 들고나온 이 작품을 직접 보았다.
바카로, Judith with the Head of Holofernes, c. 1620s (사진=유창선)
바카로는 카라바조(Caravaggio)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화가였다. 특히 명암대비와 인물의 자연주의적 표현에서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이 그림에서도 카라바조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난다. 그런데 뭔가 조금 아쉽다. 이 주에 대한 워낙 강렬하고 개성있는 그림들이 많기에 바카로의 유디트는 자기만의 독창성이 약해 보인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들고 있는 유디트의 얼굴은 분노, 결연함, 속시원함.... 어떤 색깔의 내면인지 애매하게 느껴진다.
바카로에게 영향을 주었던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자.
카라바조의 그림
목이 잘리는 적장의 고통과 공포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적장의 목을 베면서도 거리를 둔 듯한 모습에 담담해 보이는 유디트의 표정이 대비된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벤 영웅적인 유디트를 잘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그림도 아르테미지아 젠틸레스키의 그림에 비하면 점잖은 편이다. 우피치 미술관이 있는 그녀의 그림은 보기만 해도 섬뜩하다.
젠틀레스키의 그림
유디트는 두 손을 사용하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짓누르며 목을 베고 있다. 옆에 있는 하녀도 같은 모습이다. 유디트의 표정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차갑다. 유디트의 원한과 분노가 절절하게 전해진다. 목이 베어지는 적장에게서는 이미 피가 흥건하게 흐르고 있다. 유디트가 사용하고 있는 칼에는 십자가가 눈에 띈다. 정의로운 심판의 의미이다.
젠틸레스키의 분노에는 자신에게 성폭행을 했던 아버지의 친구 화가에 대한 분노가 깔려있다고 해석된다. 젠틸레스키의 아버지 오라지오가 카라바조의 제자였다. 그래서 그녀 또한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 나타나는데, 이 그림을 보면 카라바조 이상의 표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카포디몬테 국립미술관에 젠틸레스키의 다른 그림도 있다.
아래는 크리스토파노 알로리의 그림이다. 적장의 목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유디트지만 얼굴에서는 분노 보다는 담담한 결연함 같은 것이 전해진다. 마치 해치웠다는 표정 같은 것.
알로리의 그림
이건 루벤스의 그림. 목을 베고 한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목을 들고 있는데도 유디트의 얼굴은 매력적이다. 강하고도 아름다운 유디트의 모습이다.
루벤스의 그림
클림트의 유디트는 팜므파탈로 간다. 젠틀레스키의 유디트와은 정말 딴판이다.
클림트의 그림
극히 일부만 소개했고,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에 대한 그림은 수십 가지가 넘는다. 왜 이렇게 많은 작품들이 있었던 것일까. 유디트의 얘기는 화가들이 그리고 싶은 영웅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유디트는 가톨릭 구약성경 유딧기에 나오는 여성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던 그녀는 아시리아의 장수 홀로페르네스가 조국을 침략하자 위장 투항을 하고는 그를 유혹하여 술에 취하게 만든 뒤 목을 벤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대의 군대는 아시리아 군대에게 승리를 거두게 된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킨 여성 영웅의 서사는 중세 화가들에게도 매력적인 스토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프리즈 서울에 온 바카로의 유디트가 다른 유디트들이 주는 생생함과 독창성에 비해 좀 밋밋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언론에 대표작으로 많이 소개는 되었는데 팔렸는지는 모르겠다.
저는 '얼룩소'에도 글을 올립니다. '얼룩소'에 가서 저를 팔로우 하시면 문화예술공연과 인생에 관한 많은 글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링크 타고 찾아주세요. 그리고 팔로우 해주세요. 반갑게 맞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