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울극복 일지 (선택의 대가)
솔직히 말하면,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빠르게 결정했고
빠르게 시작했으며
그 사이 필요한 것들은 하면서 배워나갔다.
꼼꼼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크게 못할 것도 없었다.
"닥치면 다 하게 된다"는 내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었다.
30대까지의 나에게는.
여기까지 쓰고 나면 이미 이야기는 절반 정도의 뻔한 결말로 치닫는다.
40대의 나는 예전과는 다르게 점점 결정하는 게 어려워지고 있으며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그 선택에 따른 대가가 점점 두려워지기 때문이라는, 우리네 40,50대의 뻔한 스토리 아니겠는가? 젊었을 때야 실패해도 다시 시작해도 되지만 나이가 많아진다는 것은 실패가 더욱 두렵고 다시 시작하기 쉽지 않아 진다는 익숙한 전개의 이야기야 너무나도 익숙하다. 하지만 이런 진부한 클리셰도 나의 이야기가 되면 그리 애잔해지는 것이 또 인지상정이라 그 뻔함에 또다시 진한 공감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나의 경우는
결정장애라기보다는 선택권의 박탈에 가까웠다.
몇 년간 나의 글의 단골소재인 "이사"는 나의 어떤 개인적인 선택이 단언컨대 단 1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남편의 석사공부를 위한 미국행도 귀국 후 생각지도 못한 울산행이며 그 울산행이 또 엇박자가 나 3개월간 머물게 된 시댁 대전이며 지금의 세종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별스럽게 생각하며 징징거릴 때가 아니다. 얼른 일어나서 아이들을 챙기고 적응시키며 나 또한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아날로그 감성 가득했던 미국 시골에선 한인 교회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사귀어 나갔고 귀국 후 지역적 정착이 어려워지면서는 때 맞춰 불어온 온라인 열풍에 합세하여 온라인 교류를 펼쳐나갔다. 현실의 아이들은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또한 잊지 않았으며 가는 곳마다 과외거리나 학원을 찾아 영어 가르치는 일을 쉬지 않았다.
달리고 달렸다.
가끔 힘이 들면 글을 쓰며 뿌리내리지 못한 삶에 대해 징징거리곤 또다시 일어나 달렸다.
하지만 자기 결정권을 잃어버린 세월의 영향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기어이 조금씩 나를 잠식해 갔고 어느 순간 글을 쓰며 징징거리거나 괜찮은 척 멋진 말로 휘감아 버리는 일조차 버거워졌다. 일상의 소중함이나 삶에 대한 성찰로 끝맺을 수 없는 한 두줄의 글들만 쌓여갔고 더 이상 발행버튼을 누르는 사소한 행위를 끝내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사실 확신할 순 없다.)
무언가 시작하기를 두려워하는 이들이나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장고를 거듭하는 이들을 아마 마음으로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하기에 벌을 받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나는 권선징악적 동화적 세계에 오래 마음을 주었던 인간이므로 나의 두려움은 나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라 끊임없이 자책하고 반성했다. 자책과 반성은 점차 작은 일 하나도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나를 만들어갔고 그건 우울의 모습으로 나를 짓무르게 했다.
나는 결국 그렇게 이해하지 못했던 결정장애자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
책들의 멋진 말들이 자신감 뿜뿜한 사람들의 친절한 충고가 스스로 해답을 찾아보라는 말조차 듣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어느 과학커뮤니케이터는 유산균을 먹고 햇빛을 쬐며 우울증을 극복했노라 이야기했다. 여름의 강렬한 햇살이 조금씩 물러가니 걷기를 조금 더 열심히 해봐야겠다.
그리고 오늘은 두 눈 꼭 감고 이글의 "발행" 버튼을 눌러보리라.
자 이제 나는 나의 선택으로 "글쓰기"를 선택해 보련다.
그 대가가 어떠할지는 미래의 내가 알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