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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May 18. 2024

내 이럴 줄 몰랐어!

내 이럴 줄 알았어!

꺼부정한 키에 많이 마른 몸, 밤새 어지럽혀 놓은 코모도( 환자용 실내 변기 ),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할머니는 힘들게 발걸음을 옮겨 화장실로 향한다. 스스로 몸을 일으키기도 어렵고 워커 없이는 걷기도 힘든 할머니는 주저앉듯이 변기에 털썩 앉으며 신음과 함께 한 마디를 내뱉는다.


"내 이럴 줄 정말 몰랐어..."


할머니의 평생은 한국 노인의 평균적 일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부농의 둘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집안 어른들이 맺어준 남편과 결혼을 했고 자녀들과 함께 미국 이민을 왔다.

보통의 이민자들 보다는 그래도 그리 궁색하게 지내지 않았고 아이들도 잘 자라주었다.

한 가지 어려움이 있다면 민주적 미국 분위기에서 여전히 유교적 가부장적으로 군림하는 남편과의 관계였다.

할머니는 그것조차도 자신의 팔자려니 생각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늙어가다가 어느 날 홀연히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노화와 죽음은 그렇게 친절하게 찾아오지 않았다.

먼저, 가족과 자신에게 늘 권위와 경제적 힘으로 군림하던 남편에게 갑작스러운 치매가 찾아왔다.

할아버지의 치매는 급격히, 그리고 매우 공격적인 행동을 동반하면서 진행되었다.

자녀들이 오래전 출가하고 두 부부만 덩그러니 생활하던 큰 집에서 할머니는 하루 24시간을 남편 돌봄에 쏟아부어야 했다. 잠시 한눈을 팔면 현관문을 박차고 집밖으로 나가버리는 남편을 지키느라 샤워는커녕 화장실 가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도 평생 해온 일인 삼시세끼 남편의 식사준비를 하고 먹이는 일은 빠뜨리지 않고 해냈다. 하지만 기진맥진한 자신을 위한 한 끼 식사는 챙기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밥 대신 선택한 음식은 한병의 Ensure ( 환자용 영양음료 ) 였다. 

그렇게 일 년을 넘게 생활한 그녀에게 급격한 체중감소와 식욕부진, 그리고 배변 장애와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의 할머니에대한 공격성이 도를 넘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된 할머니는 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급하게 부모의 집을 방문한 아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부모의 일상적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아들은 심각한 치매와 이상행동을 보이는 아버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후 어머니는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갔다.

하지만 남편의 간병인으로 살던 할머니는 돌봐야 할 대상이 사라지자  심각한 우울과 강박, 그리고 식욕부진과 변실금이라는 자신의 문제에 맞딱뜨리게되었다. 

일주일 남짓 한시적으로 아들집에 머물던 할머니는 급하게 노인 요양시설인 우리 집으로 입소해야 했다.


제대로 된 식사가 생략되었던 일상과 스트레스는 할머니에게서 식욕을 앗아가 버렸다.

장기간 적절한 음식물이 들어가지 않던 장에서는 음식물을 분해하고 적절히 배출하던 기능이 사라져 버렸다.

기능이 상실된 대장에서는 배변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몇날 며칠 변비로 고생하면 변비약을 먹고 변비 이후에는 설사가 뒤따랐다. 게다가 몇 번의 미니 스트로크로 대변 조절 기능이 사라져 버리자 배변 사고가 자주 일어나게 되었고 '변이 덜 나오도록 밥을 덜 먹어야겠다.'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짧게는 일주일, 길어도 한 달이면 시설에 적응하는 다른 분들에 비해 할머니의 경우는 총체적 난제였다. 게다가 배변 문제상황이 드러나고 반복될수록 할머니는 더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돌보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규칙적인 배변이 이루어지도록 도우면서 동시에 인내심을 갖고 그녀의 잘못된 신념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다.


변이 덜 나오도록 적게 먹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규칙적으로 잘 먹어야 변도 규칙적으로 보게 된다는 사실을.

더러워진 기저귀를 부끄러워하기보다는 화장실에 가야한다고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변 사고는 '더러운 짓거리'가 아니라 배변 장애이므로 치료와 관리가 필요한 의료적 문제라는 사실을.


오늘 아침에도 변기에 앉아 더럽혀진 기저귀를 보며 할머니는 똑같은 말을 뱉어냈다.

"내 이럴 줄 정말 몰랐어..", "내가 이런 더러운 짓거리를 하게될줄이야.."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이 말은 버나드 쇼의 묘비에 씌여있다는 말이다.

왜 사람들은 George Bernard Shaw처럼 언젠가 자신이 늙고 병들어 묘지에 묻히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것일까?, 왜 할머니는 "내 이럴줄 정말 몰랐다."고 하는것일까?

아니,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애써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닐까?

어제와 같은 오늘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어제보다 조금 불편하고 힘들어진 심신은 젊었을 적의 그때처럼 곧 다시 회복되어 괜찮아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 무엇보다 내게 죽음은 여전히 남의 일일 뿐이라는 부정으로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노화와 죽음은 생각보다 빨리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의 마지막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저녁 노을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붉은 태양이 산너머로 들어가는 순간을 볼때마다 그 속도를 실감한다.

그처럼 빨리 찾아오는 두려운 노화와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현실을 직시하는 것뿐이다.

가끔씩 아프던 고관절이 이제는 항상 아프다는 사실을.

십 년 선배가 늘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며 맥없이 질금거리는 한쪽눈의 눈물을 찍어내던 것처럼 이제는 나도 그렇게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의 마음은 3-40대 청춘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60대라는 엄연한 사실을.

무엇보다 평균수명만큼 산다해도 내가 두발로 건강하게 걸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할머니는 조금씩 나아져 가고 있다.

매끼 식사를 거르지 않고 하고 계시고 배변도 얼추 규칙적으로 하시기 시작했다.

물론 할머니가 배변의 기미를 보이면 아직까지는 모든 스텝들이 긴장하고 일일이 살펴드려야 한다.

하지만 늘 입에 달고 있던 "내 이럴 줄 정말 몰랐어."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좋은 신호다.

그 소리는 조금씩 자신의 노쇠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소리일터다.

나는 할머니가 한걸음 더 나아가 언젠가는 눈을 들어 오늘처럼 파랗게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고, 함께 사는 어르신들과 미소 지으며 대화하고, 찾아오는 가족들에게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웃으며 말해주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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