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씁쓸하고 때론 감미롭고.
마주치는 사람들이 불친절했다.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20개월 만의 한국 방문이었다.
다음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직항을 타리라 마음을 먹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배 이상 차이나는 항공료로 또다시 조지아 애틀랜타를 거쳐 인천으로 들어가는 항공편을 끊었다. 산통을 겪으며 다시는 임신하지 않으리라 결심하는 새댁처럼 장거리 비행의 고통을 그사이 잊어버린 탓이다. 젊은 아들과 동행하는 길이니 조금 낫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코노미석의 좁은 공간에서 겪는 혼자만의 신체적 고통이 동행이 있다고 나아질 리가 있겠나. 게다가 새벽 3시부터 서두르며 시작된 한국행은 다음 날 오후 2시쯤이 되어서 끝날 때까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을 만큼 힘들었다.
멍한 상태로 도착한 인천공항.
그사이 무엇인지 조금 더 달라져있었다. 수원 동생집에 가기 위해 타던 리무진 버스 정류장의 위치가 바뀌었다. 분명히 공항을 나오면 바로 버스들이 보이고 구석의 매표소에 가면 매표원이 표를 팔았었는데 버스도 매표소도 보이지 않는다. 어리둥절하며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열심히 전화기를 들여다보던 아들이 길을 한번 더 건너면 리무진 버스 터미널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아, 그 사이 또 업그레이드된 것인가?
그렇게 길을 한번 더 건너가자 버스터미널 건물이 있고 티켓은 키아스크를 이용하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동생집은 어느 쪽이더라? 동수원? 서수원? 한일타운이라는 정류소에서 내려야 한댔는데...
어디를 봐도 한일타운 방향으로 가려면 어느 티켓을 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또 열심히 전화기로 지도를 들여다보던 아들이 그냥 아무 수원행이면 될 것 같다고 말하며 티켓을 끊었다. 그래, 수원이 뭐 거기서 거기겠지. 조금 찜찜했지만 운전기사에게 물어보면 될 거라고 쉽게 생각하고는 승강장으로 나갔다.
조금 지나자 들어오는 수원행 버스. 기사 아저씨는 정차된 버스의 짐칸을 열었고 승객들은 하나둘 짐가방을 그 속에 집어넣었다. 내 가방도 버스 밑 집칸에 집어넣어지고 나는 기사 아저씨에게 다가가 이 차가 한일타운에도 정차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나를 힐끗 쳐다본 기사 아저씨, 너무도 불친절하게 "이 차는 그쪽으로 안 가요."라고 말한다.
당황한 나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고 아저씨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투로 표를 다시 끊으란다.
아놔,,, 이를 어쩐다. 나와 아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장시간 비행은 말할 것도 없고 유심칩을 사서 여벌로 가져온 전화기에 집어넣는 과정에 생긴 문제들로 두 시간 가까이 낑낑댔던 터라 거의 그로기 상태였다. 오고 가기만 함께 할 뿐 곧바로 각자의 여행 일정을 가질 예정인 아들은 포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혼자 차에 올랐다. 수원 어디서든 내려 택시를 타면 되겠지.
하지만 좌석에 앉은 나의 마음은 얹잖음과 불쾌함으로 무겁게 잦아들었다.
한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교통카드 충전이다.
도착 다음날 아침, 나는 가까운 편의점에 들렀다. 그곳엔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내 또래의 아주머니가 일을 하고 있었다. 계산대 앞에서 교통카드와 현금 카드를 들고 서있는 나에게 다가온 아주머니는 내 손을 한번 쓱 보더니 다짜고짜 "카드는 안돼요."라며 휙 돌아서 정리하던 물건더미로 돌아가버렸다. 순간 나는 "카드가 안된다는 말은 뭐지?, 오래 안 쓴 교통카드라 안된다는 소린가???" 몇 초 뒤 "카드결제"가 안된다는 소리구나 싶은 순간 "카드로는 결재가 안된다고요."라는 말이 등뒤에서 들려왔다. 순간 불쾌함이 불쑥 올라왔지만 아쉬운 사람이 참아야지 어쩌겠나, 나는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밀며 충전을 요구했다. 보통 몇만 원어치씩 충전하던 내 지갑엔 5만 원짜리 지폐도 들어있었다.
왜 이렇게들 불친절한 것일까?
불과 20개월 만에 마주한 내 나라 사람들의 얼굴들은 여유 있고 웃는 모습들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마주친 사람들이 그날 우연히 다들 짜증스러웠고 피로했던 것일까?
"아이코, 잘못 끊으셨네, 표를 다시 끊거나 아니면 수원역쯤에서 내리면 한일타운이 멀지 않을 거예요."라든가, "교통카드 충전은 현금으로만 결재하는데 잘 모르셨나 보군요."라고 말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날 저녁 나는 동생과 식탁에 마주 앉아 무엇이 한국을, 한국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생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졸업을 앞둔 두 명의 대학생 자녀, 비자발적 은퇴가 목전에 있는 제부, 간병을 요하는 시부모. 이 모든 삶의 과제들이 숨통을 조여 오는 가운데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성이 그 모든 어려움들을 가중시키고 있다 했다. 동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렴풋이 한국 사회가 다 함께 과도한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비상식이 국가와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는 상황 속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개인의 삶은 하나하나 짜증과 화남, 불친절로 드러나고 있었던 거다.
20개월 만에 찾은 내 고향이 지금 많이 아파 보였다.
근로자의 날, 비 내리는 쌀쌀한 종로에서 비옷을 입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그들을 거리로 내몬 그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알 수 없는 슬픔으로 젖어들었다.
이제 얼마후면 세상이 조금은 달라질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 내 조국 대한민국은 '사람 사는 세상'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더 친절할 수 있도록 개인의 삶이 여유로워질 수 있기를, 길가의 상점과 일터마다 활기가 넘쳐나기를, 국민 주권의 나라 위에서 '평범한 친절과 웃음'이 다시 찾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0여 년 만의 만남이었다.
나는 학부의 성격이론 시간에 처음 한 이론을 배우게 되었다. 그 이론은 학부와 대학원을 거쳐 내 삶의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 년에 몇 번씩 있는 정기 웍샵은 말할 것도 없고 지도 교수님의 아파트에서 갖는 집단상담의 경험은 나를 이해하고 성장시키는데 큰 자양분이 되었다.
20년 전, 미국 이민을 앞두고 나를 배웅하는 의미에서의 웤샾이었다. 어떤 이들은 나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불투명한 내 앞날을 같이 걱정해주기도 했다.
그때 석박사를 미국에서 하셨던 우리 학회 모임의 지도교수님이 나를 바라보며 한 말씀하셨다.
"나무를 옮겨 심어도 몸살을 앓는데 사람이 낯선 나라에서 오죽하겠냐.." 하시며 걱정과 격려를 해주셨었다.
그 모임은 내가 떠난 뒤 흐지부지 되었고 멤버들은 학회멤버였다는 정체성만 가진채 흩어졌다.
이번 나의 한국방문을 계기로 그 모임의 멤버들이 다시 모여서 웍샾을 갖기로 했다.
20년간 한국을, 그 모임을 떠나 있던 나의 절실한 바람이기도 했지만 92세 지도 은사님의 소망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을 모아 우리는 대부도의 한 펜션에 모였다.
은사님이나 몇몇 분들은 한국 방문 때마다 만나기도 했으나 어떤 이들은 거의 20년 혹은 25년 만의 만남이었다. 함께 둘러앉은 우리들은 마치 얼마 전에도 만났던 것처럼 반가웠고 20여 년의 세월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건강하셨던 은사님이 구순이 넘은 노인이 되어 계셨고 대부분의 우리들은 은퇴를 했거나 앞두고 있었다. 우리들은 혈기보다는 지혜에 더 가깝게 있는 듯 보였고 그 지혜로 자신의 삶을 잘 통합해나가고 있는 듯 보였다.
1박 2일로 진행된, 어쩌면 마지막이었을 웍샾을 보내며 내 마음은 '우정'이라는 이름의 따뜻함이 넘실댐을 느꼈다. 나의 젊은 날을 기억하며, 우리들이 함께 만들어내던 삶의 찬란했던 순간들을 공유했던 사람들, 그들과의 밤늦도록 이어진 만남은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었다.
인생의 기쁨은 어느 짧은 순간 생겨나고 그 순간을 기억하는 많은 시간들을 잔잔한 기쁨으로 물들인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와인 한잔씩을 손에 들고 웃고 울던 시간들이 미소와 함께 피어오른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 잘 살아왔음을 축하해 주며 '내려놓을 수 있는'시간에 무사히 도착한 것에 감사했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내가 앞으로 몇 번이나 그들을 만날 수 있을지, 그들과 또다시 조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과 나눈 1박 2일의 시간은 내가 기억하는 한 언제든 소환되어 내게 즐거움을 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