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코코넛, 스크랴빈
지금의 내가 내가 원하는 나일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보르도의 한 레스토랑에서 남자친구와 저녁을 먹으면서 프로이트의 질문들(Questionnaire de Proust)에 대해 떠들던 기억이 난다. 청소년기 프로이트가 만든 심리적인 게임 같은 것인데, 답변의 키워드에 따라 커다란 의미가 있었는 줄 알았지만 그런 것은 없다고 한다. 그래도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공유해볼까 한다.
Le principal trait de mon caractère. 나의 메인 성격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 질문에 나는 카리스마라고 0.1초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랬더니 정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격한 공감을 들었다. Mon principal défaut. 나의 가장 큰 약점은 규율적이지 못한, 어쩌면 너무 즉흥적인 점이라고 대답했다. Mon rêve de bonheur. 사랑과 존경으로 가득한 나만의 가족을 만드는 것.
이 질문의 답변들은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어떻게든 공통분모를 찾으려면 찾을 수는 있다. 그건 바로 나의 이성과 감정에 대한 고찰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스스로를 이성의 끈을 절대 놓지 않는 쓸데없는 감정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아마도 나는 남들에게 카리스마 있는 진취적인 인간으로 그려지고 싶은 소망이 있나 보다. 그렇게 보이도록 노력하고, 그렇게 행동하려고 한다. 싫은 소리를 듣거나, 감정적으로 싸움이 번져나갈 때도 항상 논리와 이성을 추구하(려고하)는 나를 그들은 정말 카리스마 있는 인간으로 본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의외로 코코넛 같은 인간이라 속은 무르다 못해 맑은 감정의 주스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정말 소중한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다. 이 감정 주스를 건드리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클래식 음악인데, 특히 피아노 콘체르토는 쿵쾅거리면서 이성의 껍질을 쪼개서 얇고 가녀린 숟가락으로 살살 과육을 긁어내어 맑은 주스를 찰랑이게 만든다. 그럼 나는 무언가 글을 쓰고 싶어지고, 아름다운 곳으로 향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곳. 파리에서 혼자 찾아가서 가만히 앉아 스크랴빈의 피아노 콘체르토, Piano Concerto in F sharp minor, Op.20를 들을 공간이 어디일까 생각해 보면... 뭐 굳이 유명한 공간이 필요할까 싶다. 오히려 평소에 자주 지나는 센강의 다리 중 하나 그것도 그냥 보행자가 많이 없는 Pont de Tolbiac이나 Pont de Mirabeau정도가 좋겠다고 생각한다. 화창하지만 아직은 바람 때문에 쌀쌀한 봄날의 트렌치코트를 동여매고 조용한 센강을 건너면서 듣는 순간만큼은 나 혼자만이 이 세상을 사는 것 같다.
가끔 12구에서 13구로 넘어가는 64번 버스에서도 Pont de Tolbiac를 지날 때 듣기도 한다. 그때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여전히 평화롭기만 하다. Pont de Tolbiac에서 바라보는 Pont de Bercy는 Pont de Mirabeau에서 바라보는 Pont de Grenelle을 은연중 연상시키기도 한다. 건축가도 다르고 주변 풍경도 다르지만 나만이 생각해 놓은 느낌이 그들을 공통분모로 만든다. 한적한 다리에서 바로 옆에 있는 유명한 다리들을 보며 언젠가 꼭 이루어야지 하는 아직은 목표에 도달하지 않은 누군가의 시선이 이 공간들을 비슷한 분위기로 연상시키는 것일 수도 있겠다.
1896년에 작곡된 아름다움에 민감한 누구에게나 즉각적인 호소를 준다는 이 콘체르토는 첫 악장의 끝부분 짧은 클라이맥스는 매번 나에게 큰 결심력을 준다. 음악을 듣고 있으면 너도 할 수 있다는 그런 용기를 얻는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너도 할 수 있을 거야. 이미 활활 잘 타고 있는 시뻘건 불꽃같은 용기가 아닌 은은하고 작지만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은 그런 신비로운 힘을 주는 그런 용기. 가끔 멘털 잘 부여잡고 살다가 작은 순간에 무너지던 나에게 해주는 일종의 무언의 호소 같기도 하다. 오늘도 이 곡을 들으면서 멀리서도, 마음속으로도 응원해 주는 모든 이들을 생각하며, 도약하기 위한 준비를 해본다.
트리포노브. 3월 23일 Philharmonie de Paris에서 Brahms의 콘체르토 1번을 연주하기로 되어있었는데 프랑스의 연금개혁 시위가 하필 매우 크게 있던 터라 아쉽게도 취소가 되었다. 정말 라스트미닛으로 취소되어서 얼마나 억울했었는지... 그래서 클립은 트리포노브의 연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