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이란, 사회 속에서, 대체불가능한 어떤 지위를 추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모든 개인은 대체불가능한 존재이다. 누군가의 자녀이자 부모, 연인이거나 친구이고, 고유한 외형적, 내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 전체를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가능’한 존재이다. 맥주를 사러 들르는 집앞 편의점의 알바생이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많은 일들은 그 주체가 사람이 아니어도 전혀 상관이 없어서 요즘은 기계가 주문을 받는 것이 익숙한 세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다양한 이유로 죽지만,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이 대체불가능한 사람들인가? 여기에도 여러 유형이 있을 것이다. 일단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개인이 중대한 상징성을 갖는다. 대통령이나 유명 정치인, 거대 기업의 회장들은 대체불가능한 정체성을 가지며, 개인의 선택이 사회 전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박근혜든 문재인이든 트럼프든, 그들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와는 별개로 그들 개인은 이미 한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의 역할을 수행했다.
훌륭한 예술가들 역시 대체불가능한 존재들이다. 고흐라는 인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의 그림들과 그 문화적 영향이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고, 다른 어떤 이도 고흐를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훌륭한 과학자들은 고유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예술가들에 비할 수 없지만, 역시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인슈타인이라는 한 개인이 이뤄낸 발견들은 너무나 중대한 것들이어서, 그 발견들은 언젠가 다른 이들에 의해 이뤄졌겠지만, 그가 없었다면 과학과 문명의 발전이 얼마나 늦춰졌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아주 유명한 사람들만이 대체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떤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면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고유한 위치를 얻게 되지 않나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닐 암스트롱은 알지만 어떤 이들이 그가 달에 성조기를 꽂는 것을 가능하게 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당대 최고의 공학자들이었을 이들은 단순한 기술자 이상의, 대체불가한 사회적 의미와 역할을 수행했다. 다른 분야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요리를 최고의 수준으로 내놓는 식당의 셰프가 사라진다면, 그 맛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저스틴 비버나 머라이어 캐리가 아니더라도, 최고의 집시 기타리스트나 반도네온 연주자, 음비라 연주자는 각각 인류 문화의 첨단을 지키고, 확장시키고 있다.
아폴로 11호를 달에 보내는 데는 '대체불가능한' 최고의 학자들이 필요했다.
한편, 단순히 돈을 많이 벌겠다는 목표는 욕망이나 수단의 추구이지, 야망은 아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이 세상에 잔뜩 있지만, 그들이 모두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루고자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또 다르겠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여행을 많이 다니겠다거나, 맛있는 것을 많이 사 먹겠다는 생각은 야망이 아닌 다른 형태의 욕망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런 욕망을 평가절하하거나, 모든 사람이 야망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야망'이라는 단어에 담겨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다 나온 생각들이다. 결국 야망은 이 세계에서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고, 이렇게 생각해보면 야망은 행복에 필요한 요소가 아니다. 많은 현명한 사람들은 이루기 힘든 야망을 좇는 대신, 그저 자신의 주위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사실 이렇게 야망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한 멕시코 음식점 때문이었다. 4호선 라인의 한 역 근처에, 1층에 작은 카페와 음식점이 여럿 들어와 있는 빌라들이 모여 있는 동네가 있다. 거기서 저녁 먹을 곳을 찾다가 우연히 들어간 타코집 사장님이, 무려 세계 3대 요리학교라는 프랑스 르꼬르동 출신이라는 것이다. 음식은 전혀 비싸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르꼬르동의 명성에 걸맞게 지금껏 먹어본 타코 중에 가장 맛있었다. 그런데 인테리어는 예뻤지만 가게는 작고 소박했고, 잘 알려지지도 않아 검색해도 결과가 많이 나오지 않고 손님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날의 저녁식사는 정말 만족스러웠지만, 내게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을 남겼다. 세계 최고의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미슐랭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셰프가 조용한 소도시에 작은 멕시칸 식당을 차리기까지의 과정이 몹시 궁금해진 것이다. 내가 내린 추측 중 하나는, 그 과정에 분명 '야망을 접는 순간'이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감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추측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지만, 처음부터 한국에 돌아와 작은 식당을 차리기 위해 그 먼 곳에 유학을 가는 사람이 있을까? 야망을 접은 것이 경제적 이유는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애초에 유학을 갈 형편은 되었다는 것이고, 그 정도 커리어라면 돈을 위해서는 오히려 다른 길을 택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작은 식당이라도 정말 유명해지길 원했다면, 홍보에도 더욱 애를 썼을 것이고, 적어도 그렇게 한적한 곳에 가게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야망을 접는다는 것은, 최고가 되기 위한 고통스러운 노력과 경쟁을 그만두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맛있는 타코를 만들기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우리의 행복과 희망이 있다.
어릴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망을 가지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대통령이 되겠다는 아이도 반마다 꼭 하나씩 있었고, 과학자, 요리사, 가수가 되겠다는 꿈에는 최고의 무언가가 되겠다는 목표가 있었지, 적당하고 소박하게 살겠다고 하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20대 중반이 된 지금 주변에서 내가 생각하는 정의에 부합하는 야망을 가진 사람은 쉽게 찾기 힘들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가졌던 야망을 버리지 못했다. 수학에서 생물학으로 분야가 바뀌긴 했지만. 가끔은 정말 저명한 학자가 되어 있는 미래를 상상하고, 노벨상을 받는 헛된 망상을 해 보기도 한다(물론 이제는 노벨상이란 게 어떤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여기에는 대학원생이나 연구원에 대한 처우 같은 현실적 문제도 있지만, 훌륭한 연구자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그 과정 속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고통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통을 피해가려 했는지를, 그것이 다가올수록 선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불확실성은 야망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고통이다.
그 고통의 중요한 부분은 불확실성이 차지하고 있다. 노력한다고 반드시 이뤄질 수 있는 야망은 없다. 높은 뜻을 품고 정치에 뛰어들어 전국을 돌며 목이 터져라 외쳐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거나, 그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 매일 피나는 훈련을 해도 어느날 불의의 부상을 당할 수도, 평생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를 넘어서지 못 할 수도 있다. 며칠을 밤새 한 실험이라고 원하는 결과를 내놓는다는 보장은 없다. 예전에는 꿈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신을 속이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꿈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흘려읽은 성공담들을 생각해보면 ‘할수있다’는 자기암시와 자기최면은 꿈을 이룬 사람들의 기본소양인 듯도 하다.
야망은 나의 성격이나 속성 같은 것이라 마음대로 버리지는 못하지만, 이것을 놓아버리면 온전한 행복에 더 쉽게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자주 한다. 물론 지금 그러고 싶지는 않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는 알고 싶다. 현실적인 이유로, 아니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야망을 포기하게 될 때가 온다면, 좀 더 쉽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프랑스의 르꼬르동에서 온 마리아 셰프에게 물어보고 싶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