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정신은 영구보존에 적합하지 않다
코로나 시대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방 안에서 온갖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존스홉킨스 대학의 이대열 교수를 줌으로 초청해 뇌의 시간척도(timescale)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다(그곳은 밤중이었음에도 세미나에 응해주시고 또 열띤 토의까지 진행하신 교수님께 경의를 표한다). 우선 강조된 사실은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의 감각이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상과학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와 같은 수준의 신경계를 가졌지만 그 생화학이 약간 달라 신호의 전달 속도가 두 배인 생명체를 생각해보자. 우리에게는 그들이 두 배로 빠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너무 ‘느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니 시간의 감각은 상대적인 것이다. 달팽이는 자신이 느리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내용은, 우리의 뇌의 각 부분들도 사실은 조금씩 다른 시간척도에 따라 기능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정말 다양한 신체/정신 작용을 하며 살아간다. 그중에는 빠르고 정확한 정보처리를 필요로 하는 운동/감각계의 것과 같은 작용도 있지만, 기억, 종합적 판단과 같은 복잡하고 느리게 일어나는 작용들도 있다. 같은 뇌의 학습이라도 그 대상에 따라 학습에 필요한 시간이 달라진다. 위험한 물건이나 동물, 독극물 같은 것들은 빠르게 학습하고 그것을 오랫동안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복잡한 주변환경을 익히고 좋은 서식지나 은신처를 찾는 일은 충분한 탐색을 통해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대열 교수가 설파한 내용은 뇌의 각 부위가 역할에 따라 다양한 시간척도에 따라 작동한다는 것이다(그는 신경과학자이기 때문에 물론 이러한 내용을 여러 실험적 증거와 함께 제시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뇌를 그 구조를 통해 분석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여겨지며 수많은 뇌의 부위별 기능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 뇌의 이러한 시간에 따른 차등적 작동에 대해서는 충분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대열 교수의 이야기였다.
위의 내용들은 뇌과학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을 내용이고, 이 글의 본론은 여기부터 시작이다.
세미나 끝에 이어진 토론에서 이 교수는 흥미로운 첨언을 덧붙였다. 아래는 세미나를 주최한 L 교수의 질문과 이대열 교수의 발언을 재구성한 것이다.
L : 여러 시간척도의 시계들을 ‒ 즉, 초시계, 분시계, 시간시계, 일시계, 월시계… ‒ 가지고 있는 뇌가 더 지능적일까요?
이 : 이것은 열린 질문입니다. 중요한 질문일수도, 그저 말장난일 수도 있습니다. 나무에게 지능이 있다면, 우리가 나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무가 느끼는 것을 가속해서 볼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는 (지능을 이해하기 위해서) 절대적인 물리적 시간을 사용해야 할까요, 정규화(normalize)된 상대적 시간을 고려해야 할까요? 저는 시간척도와 지능, 그리고 생명체의 수명을 연결하고 싶습니다.
(…중략…)
이 : AI의 관점에서 죽음은 그저 시스템 리셋일 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수명, 즉 죽음이란 시스템을 재학습 시키느니 리셋하는 것이 나은 시점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요?
충격적인 관점이었다.
진화론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런 관점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많은 생물들이 자연에서 수명이 다하여 죽기보다는 다른 원인들로 죽기 때문에, 지능과 학습 체계가 노후화된 개체를 제거하는 유전자가 특별히 선택받았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은, 영생에 대한 인류의 갈망이었다. 인류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하나의 인간 정신이 육체적 한계에 의해 소멸하지 않고 영속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은 정신을 컴퓨터에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영생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뇌를 담은 육체가 영생하든 우리의 정신이 컴퓨터 속에서 영생하든, 그것은 인간을 초월한 무엇인가가 아닌, 인간 정신의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존재일 것이다.
세상을 돌아보면 알 수 있듯, 대부분의 인간은 나이가 든다고 더 현명해지지 않는다. 보통은 그 반대다. 변화하는 사회의 가치관에 적응하지 못하고, 생각의 유연성이 떨어지며, 과거에 학습한 것을 일반화하여 변화한 현재에 잘못 적용한다. 세상은 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면서 변화하기보다는, 새로운 생각을 가진 세대가 힘을 얻으면서 변화한다. 변혁에 성공한 이들은 거기에 걸맞는 자질과 정신을 갖췄지만, 그 후의 사회를 안정되게 이끌어나갈 능력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왕정을 뒤엎는 데 성공했지만 그 후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고, 결국은 나폴레옹이라는 황제가 등장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끝은 공산 독재였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주역이었던 이들은 이제 국가의 중심에 서서 적폐를 답습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민주화는 이뤄냈지만 정작 민주적으로 살아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그들이 젊었을 때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으므로). 그래서 사회는 실패를 거듭하며 변화한다.
그런데 어느 시점의 개인들의 정신이 영구적으로 보존되어 사회에 남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내 생각에 이는 재앙이다. 인간의 뇌는 무한히 유연한 사고를 갖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인간 학습의 시간척도는 길어야 몇십 년인 것이다. 노후화된 뇌들을 재학습시키기는 거의 불가능하며, 인간 전체 집단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논의를 받아들인다 해도, 누군가는 자신은 영생을 누릴 자격이 충분한 정신을 가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런 사람은 지구상에 없거나, 있어도 한두 명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고착화된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수많은 논리를 준비한다. 그런데 다음 세대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어서, 우리가 준비한 논리들이 무의미해진다. 마치 구세대들이 ‘자연과 세상의 섭리’로 그들의 오래된 가치관 ‒ 예를 들자면 결혼과 출산의 의무 같은 것 ‒ 들을 정당화하지만, 다음 세대에게는 ‘자연의 섭리’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젊은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세계관과 가치관이 등장할 지는 예측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우리의 정신이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우리는 한 번 밀려나서 영원히 도태되거나, 아니면 우리가 인류 전체를 도태시킬 것이다. 후자가 훨씬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일 것인데, 영생을 얻는 이들은 그 시점에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생을 얻은 자들이 뒷방으로 물려나려 할 리가 없다. 그들은 ‒ 잠재적으로는 미래의 우리들은 ‒ 계속해서 이 세상에 자신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반영하고,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할 것이다. 그 일에 질릴 때까지는 영원히.
이런 생각은 인류가 정말 영생을 원한다면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뇌를 여러 차원에서 점점 더 상세히 파악해나가고 있다. 미소한 분자적 스케일에서부터 뇌 전체의 시스템적인 접근까지 우리의 이해는 끊임없이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신이 영속적인 것이 될만한 가치를 가지려면 인간 정신의 온전한 재현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적어도 인간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포용적이며, 깊고 넓은 사고를 할 수 있는 정신이어야 한다. 또한 무한한 시간척도를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과거에 학습한 것이 무용해지면 과감히 폐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인간의 뇌를 이해하고 나면, 다음으로 할 일은 그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구적으로 보존될 만한 위대한 정신이 정확히 어떤 모습을 해야 할지는 나도 한낱 인간이라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이 인간의 한계에 묶여 있다는 전제가 깨지지 않는 한, 나는 영생에 반대한다. 이는 내 개인적인 취향이나 인생관이 아닌, 인류의 미래와 행복을 위한 생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