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ARE SOLAR SYSTEM SUPER STARS!
페퍼톤스의 명곡을 꼽으라면 <행운을 빌어요>, <공원여행>이나 1집의 <Superfantastic>, <Ready, Get Set, Go!>를 많이들 떠올리겠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5집 <HIGH-FIVE>에 실린 노래들이다. 가창력을 지적하며 왜 객원보컬을 쓰지 않느냐는 반응들도 있었지만, 나는 페퍼톤스의 노래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 그 둘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HIGH-FIVE>는 페퍼톤스 특유의 소년감성에 성숙해진 연주력에서 샘솟는 파워와 청춘의 끝에서 일어나는 향수가 뒤섞인, 기분 좋고 애틋한 앨범이다.
러시아워의 서울 스트리트 다음 역은 역삼 스테이션 유후
아침마다 샌드위치 맨 초점 없는 나의 눈이 번쩍
바로 지금이다
와-인드업 너를 향해 얼음 같은 너의 마음 한복판까지
와-일드피치 흔들리는 운명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굿모닝 샌드위치 맨>
몸을 들썩이는 기타 리프로 시작하는 앨범은 첫곡부터 가슴에 직구를 꽂아넣는다. 그렇지만 페퍼톤스 로큰롤의 카타르시스는 다음 곡에서 찾아온다.
기나긴 기다림이 끝나고 전설 속의 쇼 타임 지금 시작한다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이세상 밖으로 떠나는 단 한 장의 티켓
처음부터 그랬었고 오늘 또 앞으로도 마찬가지
바라보고만 있는 너에겐 결코 기회가 없어
일어나!
달려와!
오늘 밤! 너! 넌 지금 당장 떠나야 해!
<SOLAR SYSTEM SUPER STARS>
울적한 밤중에 혼자 엄마 차를 몰면서 이 곡을 크게 따라불렀을 때, 나는 신나는 곡을 들으면서도 눈물이 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태양계 밖으로 우리를 날려보낼 기세였던 앨범은 점점 잔잔해지면서 옥상달빛과 부른 풋풋한 느낌의 <캠퍼스 커플>, 통통 튀는 신스의 <몰라요>, 느낌 그대로 청춘영화의 엔딩곡인 <청춘>, 햇살이 따스한 오후 산책하며 듣기 좋은 <스커트가 불어온다>가 이어진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것을 후려갈기는 인터미션 곡 <POWERAMP!!>로 다시 분위기가 전환되고, 빠른 템포의 경쾌한 <NEW CHANCE!>와 <FAST>가 이어진다. 늘 <FAST>를 들으면 지금은 거의 접은 일렉기타를 좀 더 열심히 연습해둘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이런 곡으로 공연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짜릿할까.
'빠르게만 달리는 세상'을 노래하던 페퍼톤스는 이제 잠시 멈춰 과거의 향수에 잠긴다. <도시락>의 잔잔한 기타와 목소리에 몸을 맡기다 보면, 사실 나는 거의 먹어본 적도 없는 엄마의 도시락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늘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내 행복의 발자취
풍요로운 은행나무 길 언덕 위에 있던 나의 동네
...
힘든 오르막길도 언덕길도 난 한달음에 올라
조막손으로 붙잡고 달려가는 작은 어깨 위에는
울 엄마가 싸준 도시락
가방 깊숙이 그 온기가
맛있을 것 같아 오늘도
얼른 먹고 싶어요
<도시락>
이어지는 <근데 왜> 까지 듣고 나면, 정말 청춘 음악의 상징같았던 페퍼톤스가 어느새 아저씨가 되었다는 게 실감난다.
근데 왜 변한 게 없는 거야 왜
어른스럽다는 건 왜 이리도 복잡한 거니
돌아가고 싶은 맘뿐이야
어쩔 수 없는 거야 왜
붙잡을 수 없다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지만
돌아가고 싶은 맘뿐이야
<근데 왜>
여기까지 앨범을 들었다면, 이어지는 <THANK YOU>와 <풍년>, 그리고 '도움 주신 분들'을 하나의 트랙으로 만든 <CREDIT>의 센스까지 감상하자.
페퍼톤스가 청춘을 보냈던 카이스트에 나는 이제야 도착했다. 이곳을 떠날 때쯤이면 내 청춘도 끝에 닿을 거란 사실이 때로는 아득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차피 시간은 흐르는 것이고, 이게 내가 가장 하고 싶던 일 아니던가. 회사를 탈출해 태양계의 슈퍼스타가 된 페퍼톤스도 결국 사십이 되었다. 다만 이런 앨범을 만들어줘서 감사할 따름이다. 세상에 온갖 노래들이 있어서, 혼자 있는 방 의자에 앉아서, 따뜻한 날 학교 잔디밭을 거닐며, 해질 녘 갑천을 건너며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있어서 다행이다. 노래를 통해 나는 언제든 어디론가 탈출할 수 있는 것이다.
기다려! 나를 봐! 여기 나! 날! 너와 함께 데려가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