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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eon Apr 30. 2021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 한나 렌

주의 : 아래 독후감은 단편집 속 작품들의 약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자유로이 유영하다 서서히 부력을 잃어버리는 느낌. 환상적인 꿈에서 깨어나, 그 기억을 서서히 잃어버리는 느낌. SF의 세계에서 서서히 빠져나오는 기분은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 세계의 특이함에 비하면 나는 한없이 평범한 인간이고, 이 세계는 내가 익히 알던 그것과 똑같으며, 앞으로 갑자기 온갖 신비한 평행우주로의 문이 열리거나 시공간이 뒤틀리는 일 따위는 없을 것임을 명백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억측이지만, 어쩌면 한나 렌도 이런 기분에서 시작해서 단편집의 표제작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을 써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한여름에도 창밖에 눈이 내리는 아침을 맞을 수 있는, 평행세계를 넘나드는 능력을 가진 세상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찌는 듯한 더위에 잠이 깨, 커튼을 열고 창밖으로 눈 풍경을 보았다.

—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의 첫 문장.


아무런 설명 없이 온갖 평행세계를 넘나들며 독자의 넋을 빼놓는 주인공의 일상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그 세계들을 넘나드는 능력을 잃어버린 주인공의 친구 마코토에게 초점을 맞춘다. 평행세계를 넘나드는 능력을 잃는다는 것은 신체의 일부를 다치거나 잃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에 갇히는 것, 그 외의 다른 모든 가능성들을 잃는 것, 그리고 모든 일들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남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세계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과 같은 것이다.


기발한 방식으로 재난 희생자들을 대하는 세상의 모습을 그린 단편집의 마지막 작품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까지 읽은 후, 책을 덮고 한나 렌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며 예의 그 아릿한 여운을 느끼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리가 없는 세계’로 돌아오는 서글픈 기분을 느꼈다. 따지자면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이 기분이 마코토가 느꼈을 그것과 조금은 비슷한 것이 아닐까, ‘SF를 가장 사랑한 작가‘라는 별칭을 얻은 한나 렌도 그 수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비슷한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 단편은 이것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이고 한나 렌은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 훨씬 섬세한 작가다. 마코토와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옆 나라에 천재가 산다‘는 정세랑의 평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이 책이 하드 SF들처럼 정교한 논리와 과학적 지식으로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섬세한 심리의 묘사와 정교한 소설적 장치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미아하에게 건네는 권총>에서 인격을 개조하는 나노머신 주입기를 ‘권총’ 형태로 디자인한 것은 정말 천재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인격을 개조하는 일은, 기존의 인격을 죽이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번에 그 주입 장치를 주사기가 아니라 권총으로 디자인한 이유는,”
조명이 더 어두워졌다. 빛을 받는 사람은 신랑과 신부뿐이었다.
“단순한 극적 효과일 뿐입니다.”
신랑신부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상대의 이마에 총을 겨눴다.

— <미아하에게 건네는 권총> 중


<싱귤래리티 소비에트> 역시 흥미로운 작품인데, 특이점에 도달한 인공지능의 지시에 따르는 한 인간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인간은 알 수 없는 방식의 초지능의 계획을 그린다. 인간은 초지능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초지능은 그것까지도 이미 계산하고 있다. 그러한 괴리가 이 단편의 기묘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자세히 다 언급하지는 못했지만, <제로연대의 임계점>과 <홀리 아이언 메이든> 역시 각자의 매력을 가진 훌륭한 작품들이다.


김초엽과 한나 렌 등의 작품을 읽으며,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사람 마음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어쩐지 촌스럽고 신파적인 것 같지만, 그것을 세련되고 아름답게 풀어내는 게 소설가의 능력일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에서도 아마 ‘우리와 같은 마음의 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갈 테고, 하늘을 나는 자동차나 화성 이주도 좋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세상은 아마 우리가, 그리고 그들이 행복한 세상일 것이다. 그래서 과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러한 SF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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