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PD 입봉일기 #4
링크드인에 업로드 중인 예능 피디 입봉일기를 브런치에도 옮겨볼까 합니다.
대단한 성과가 나서 올리는 입봉일기면 좋겠지만 아직 과정 중에 있어요.
뿌듯한 감정 49, 두려운 감정 51 로 분투하는 햇병아리 리더의 생각 흐름을 보고
공감하거나 위로받을 팀장님들, 대표님들, 그리고 직장인 분들이 브런치에도 많을 것 같아서요.
*** 사진은 AI 로 작업합니다.
예능이라고 다 같은 예능이 아닙니다. 연차로 줄을 세우기엔 너무들 다른 경험을 해요. 저는 스튜디오에 세트를 차려놓고 계획에 따라 찍는 구성이 익숙합니다. 스튜디오물 중에서도 세팅의 끝인 음악 방송을 주로 만들었거든요. 풀어두고 찍는 리얼리티보다, 준비된 큐시트에 딱 맞추는 생방송이 더 마음 편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입봉작이 하필이면 야외 리얼리티네요. 큰일도 이런 큰일이 없습니다.
원하는 그림이 있는데 그걸 표현하는 방법은 모르겠는 느낌. 준비는 하고 있는데 맞는 과정인지 의구심이 드는 하루하루. 처음 음악 방송을 시작할 때와 비슷합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조연출이 해결해야 하는데, 100 명 가까이 있는 감독님들 중 누구와 얘기해야 하는지조차 몰랐거든요. LED 가 망가졌을 때와 VJ 소스를 변경해야 할 때 각각 다른 사람에게 문의해야 한다는 걸, 음원 문제가 있을 때와 음향 문제가 있을 때 각각 다른 원인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걸, 처음엔 알 수가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한 회 한 회 거치며 문제 해결을 오백 번쯤 했더니 전체 시스템이 그려지더라고요. 그제야 거대한 스튜디오를 안방처럼 다니며 아이디어를 적용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야외 리얼리티라니. 물론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주력 장르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인지 괜히 불안합니다. 음악도 했는데 왜 못해, 규모도 작고 시스템도 더 단순한데 왜 못해, 라는 친한 선배들의 말도 좀처럼 귀에 들어오질 않았어요. 그러다 어제, 같이 촬영 갈 카메라 감독님과 대화하며 마음속 불안이를 약간 진정시켰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한참 들으시더니 현실적인 조언을 담담히 해주시던 감독님. 카메라 운용뿐 아니라 조명과 소품 세팅에 대한 의견까지 주시는 감독님의 말씀엔 깊은 경험이 묻어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스튜디오와 야외 리얼리티를 너무 양분시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수많은 감독님들께 의견을 여쭈어 가며 만드는 과정은 똑같은데. 장소의 특성이 다를 뿐, 피디가 판을 깔고 중심만 잡아드리면 전문가들이 챡챡 움직이는 건 똑같은 건데. 그렇게 많은 회차를 해 왔는데도, 겉껍질 모양이 다르다며 두려워하기만 했습니다.
능력 밖의 일, 맞아요. 감독님들이 전문인 영역은 제 능력 밖이죠. 하지만 늘 하던 대로 계속 시뮬레이션하고 커뮤니케이션하며 다 같이 만들면 되는 거였습니다. 능력 밖의 일이지만, 능력들을 모아 만드는 것이 제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고 가야겠어요. 겁이 나지만 겁먹지 않겠습니다. 적어도 능력을 모으는 능력자는 될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