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년어치 당근

예능 피디 방학일기 #5

by 희제


부모님 집에 묵으며 연휴를 보내는 동안, 25년 된 소파와 25년 된 침대, 그리고 36년 된 서랍장을 당근으로 나눔했습니다. 자식들을 모두 독립시킨 후, 부모님은 함께 살던 집을 두 분만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중이거든요. 그 과정에서 도합 86년어치 가구들은 누군가의 집으로, 사무실로, 그리고 공장으로 떠나갔습니다.


당근 소파 1.jpeg 반반세기 함께한 소파야 안녕 건강해야 해


소소하게 가방, 인형, 소형 전자기기 같은 것들을 당근할 때와는 조금 다른 기분이에요. 깊은 추억이 어린 물건이 다른 누군가의 공간을 꾸미게 되다니. 새삼 공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봅니다.


저는 영상을 하는 사람이고, AI 콘텐츠에 관심이 많지만, 결국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과 커뮤니티는 힘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일을 돕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은 줄어들 거고, 더더욱 사람들과의 연결, 그리고 공유하는 공간을 중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전거가 사랑받고, 종이에 글 쓰는 일이 사랑받는 것처럼요.


사실 제게는 커다란 꿈이 하나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가벼운 음악이 흐르고, 차고를 개조한 중고 매장처럼 필요한 물건을 업어갈 수 있는 곳. 몇 시간 동안 작업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만든 수공예품을 전시해두기도 하는 곳. 제가 이런 꿈을 말했을 때 처음 들은 말은 “그럼 왜 피디를 하느냐”는 질문이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궁극적으로 같은 가치를 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제가 만든 프로그램을 보고 새로운 사람을, 삶의 형태를, 그리고 재미와 가치를 알게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니까요. 다양한 인생을 서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일과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을 만드는 일, 그리고 나아가 당근이라는 플랫폼까지, 모두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의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모든 가구들에게도 각자의 이야기가 있겠지요. 이젠 부모님 집의 다음 이야기를 채워줄 소파를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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