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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제 Mar 03. 2022

외국계 회사는 처음이라서 1

비슷한 듯 다른 분위기에 적응 중입니다.


대기업에서 외국계 회사로 이직했다.



사실 ‘외국계 회사’라는 말이 올바른 어법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외국계라니. 외국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외국계라는 말인가? 미국 회사라거나 독일 회사라고 말하면 될 것 같은데. 외국이라는 단어로 묶기에 영국 회사와 중국 회사는 너무나 분위기가 다르지 않나.


이런 의구심을 마음 한 구석에 품고서도 선뜻 제목에 적어둔 건, ‘외국계 회사’라는 단어 조합만이 가질 수 있는 느낌을 알기 때문이다. ‘글로벌 컴퍼니’라는 표기에선 느낄 수 없는 ‘외국계 회사’만의 느낌적인 느낌. 그리고 다행히, 내가 새로 몸 담게 된 회사는 그 ‘느낌’을 제대로 갖고 있었다.


이 글은 대기업에서 외국계 회사로 막 이직한 사람의 따끈따끈한 감상이다. 겨우 한 달 다닌 사람이 뭐 그리 많은 걸 느꼈을까 싶지만, 이 시점에 글을 쓰게 될 만큼 대기업과 외국계 회사는 아주 많은 것이 달랐다. 아직 본격적인 제작 실무를 시작하진 않았으니, 어쩌면 시스템적인 측면에 대해 더 날것의 감상을 기록할 수 있지 않을까.



공기 같은 영어


다시 태어나면 꼭 바이링구얼이 될 것이다. 어릴 때부터 모국어와 영어를 같이 쓰며 자라는 오리지널 바이링구얼 말이다. 난 아직도 돈 걱정 없는 부자보다 외국어 능통자가 훨씬 부럽고, 다른 나라 말로도 생각을 자유롭게 전달하는 사람을 보면 그 멋있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운 좋게도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우는 첫 세대가 되었으나 투부정사와 과거분사의 고통은 영어를 포기하기에 충분했고, 뒤늦게 영어의 중요성을 깨달았지만 뇌는 이미 굳어 있었다.


그런 내가 외국계 기업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한국 콘텐츠의 위상 덕분이다. 제작 환경은 로컬 룰을 따르기 마련이므로, 회사도 영어보다는 제작 커리어에 포커스를 맞췄던 것 같다. 딱 하나 있었던 영어 질문(왜 우리 회사에 오려고 합니까?)에 낯부끄러운 답변(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서요!)을 하고도 면접을 통과한 부작용으로, 그래 봤자 상암동에 있는 회사인데 영어 얼마나 쓰겠냐며 배짱 좋게 입사를 했더랬다.


들어와서야 깨달았다. 여기는 서울 안의 외국이라는 사실을. 한국인이 아닌 직원분들은 너무 자연스럽게 섞여 계셨고, 첫날부터 영어 메일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이 모든 상황을 너무 자연스럽게 대하는 회사 분위기 때문에 내가 미국 대사관에 있는 건 아닌지 헷갈릴 정도였다. 교환학생 때에는 내가 수업 듣고 돈 쓰는 입장이었지만 여기선 업무를 해야 하는 입장 아닌가. 시차 때문에 밤 열한 시에 시작되는 신규 입사자 교육 (물론 영어로 진행되었다...) 을 들으며, 나는 필수적으로 이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리얼 ESG


영어 메일에서 느낀 충격의 끝은 타운홀 미팅 (Town Hall Meeting) 이었다. 아시아 태평양 지부의 올해 마지막 미팅이니 꼭 참여하라는 권유. 그에 따라 얼떨결에 들어간 줌 미팅. 영국과 인도와 뉴질랜드를 넘나드는 카메라 속에서,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발표를 하고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외국계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보고 체계가 있는 하나의 회사 아닌가. 당연히 대표자의 훈화 말씀을 듣는 그저 그런 자리이겠거니 하고 들어간 건데. 정작 아시아 태평양을 대표하는 분은 딱히 긴 말을 하지 않았다. 더 신기한 점은, 우리 모두 함께 열심히 일합시다 파이팅, 같은 기조가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환경, 아동, 젠더, 장애인 등의 주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화하는 모습들. 실제로 이런 기조를 지켜가며 제작한 프로그램과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그 성과까지 공유하고 있었다. 영리 기업인 만큼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목적에만 몰입하다 다양성 추구라는 중요한 골을 잊지 말라는 의도 같았다.


ESG 를 부르짖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엔 눈앞의 성과를 붙잡는 기업이 많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고, 기업의 의무를 부르짖기라도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이런 별천지에 들어와 보니, 여기서는 정말 다양한 주제를 다룰 수 있겠구나, 정말 멋진 환경이구나, 생각하며 설레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자유 책임 그리고 존중이라는 유니콘


직원들에게 자유를 주되 책임 지게 하는 회사. 모든 구성원을 존중하는 회사. 어쩌면 이건 “외국계 회사”라는 단어가 주는 메인 이미지일 것이다. 이상적이긴 하지만 참 유니콘 같은 개념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 유니콘을 실제로 맞닥뜨려 버렸다.


사실 선배들 대부분은 나와 같은 회사 출신이다. 채널이 달랐기 때문에 전부터 알고 지낸 분들은 아니지만, 공통적인 회사 분위기라는 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일 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이곳을 먼저 겪은 선배들은, 어쩌면 같은 컬처 쇼크를 겪고 있을 나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조곤조곤 해 주었다.


그분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건 여유를 갖고 천천히 적응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 회사는 시간을 준다고. 충분히 퍼포먼스를 낼 수 있게 기다려주고, 그러다 보니 그 자유 안에서 자연스레 책임감이 생긴다고. 좀 더 직설적으로 말을 풀자면, 회사가 주는 압박감이 없다 보니 압박감을 자체 생산함으로써 그걸 연료 삼아 일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선배들은 높은 자유도의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기획안을 쏟아내고 있었고, 그것을 내게도 권해 주었다.


한 달 정도는 적응하는 기간을 가지라는 말도 참 놀라웠다. 이전 회사는 항상 사람이 부족했고, 그래서 생각할 여유 없이 일하는 것이 무척 당연했다. 여기로 넘어와도 바로 투입되어 100m 달리기를 시작할 것이라 막연히 예상했는데. 정말 아무도 나를 터치하지 않고 있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나의 루틴을 스스로 만들고 있다.


처음으로 플랜이라는 것도 세워 봤다. 언제까지 기획안을 몇 개 써서 언제 이런 프로그램을 해야지, 하는 것들 말이다. 러프하게나마 이런 목표를 세우고 나니, 매일 일정 시간을 투자하여 회사와 시장에 대해 공부하고, 나의 키워드를 잡아나가는 일도 자연스레 하게 됐다. 사실 이런 시간은 피디들이 반드시 지속해나가야 할 필수적인 시간인 건데.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일을 처리하기도 벅찬 나머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살던 지난날들이 조금 부끄럽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결과적으로, 선배들은 잘 왔다고 말해주었다. 큰 회사를 두고 굳이 모험을 하기 위해 찾아온 후배를 위로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같이 좋은 회사를 만들어 보자는 말이 어찌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그건 회사에 대한, 피디를 피디로서 존중해 주는 회사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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