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시콜콜 #3 사람과 하는 일
20년도 넘은 고물 프린터가 있다. 겉면은 샛노랗게 바랬고 더 이상 드라이버도 제공되지 않지만, 유에스비 포트로 연결하면 흑백 프린트 몇 장쯤은 할 수 있는, 없으면 아쉬울 그런 프린터다. 버려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이사할 때마다 끌고 다닌 지 몇 년. 이제는 정말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운동을 하고 돌아온 어느 날.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프린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섬주섬 드라이버와 니퍼를 꺼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분해해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좀 더 수월한 폐기를 위해 재활용 가능한 부품을 분리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보내주기 전에 그의 속마음을 한 번쯤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 같다. 오랜 세월 고생해 준 기계를 위한 경건한 예식처럼 말이다.
겉면의 플라스틱 덮개를 벗겨내자 수많은 전선들과 전자기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나 티피컬한 "기계"의 비주얼이었다. 아담한 모양새로 언제나 책상 밑 발치를 지키던 그 하얀색 프린터가 맞나 싶을 정도로.
프린터의 맨얼굴을 보고 있자니 쇳덩이를 깎고 회로를 공부하던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대단한 비전이 있어서 간 기계과는 아니었다. 과설명회 때 기계과에서는 김밥이 아닌 피자를 주었고, 나는 기계치니까 기계과에 갈 명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공부하다 별로면 다른 거 하지 뭐, 라는 태평스러운 생각도 함께 들었고. 아니나 다를까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그때 우직하게 공부했던 친구들은 멋진 연구원이 되었고 말이다.
이젠 각자의 업계에서 대리 과장급이 된 친구들. 얼마 전엔 공학 필드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데, 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회사에서 가장 저렴한 건 나야. 나도 나도. 몇억짜리 기계님을 우리가 모시고 산다니까 깔깔깔.
그러고 보니 그랬다. 아무리 인건비가 높아도 실험 장비들과 재료값에 비할 바는 아니니까. 동시에 참 새삼스러웠다. 우리 업계에서는 인건비가 가장 높은데. 제작비를 짜다 보면 연출료와 문예료로 한 무더기가 나가고, 감독님들 비용으로 또 한 무더기가 나간다. 촬영 한 번 하려면 부수적인 인건비는 또 얼마나 많이 드는지. 로봇이 사람을 대체할 날이 도래했다는데, 내겐 영 머나먼 이야기 같다.
문득 느낌표가 스쳐갔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힘들구나. 어떤 회사든 힘든 건 사람 때문이라는데. 여긴 사람이 중심이니 당연히 더 힘들 수밖에. 수많은 장비에 둘러싸여 있지만, 결국 의견과 감각이 관여하는 일을 하다 보니 누가 맞고 틀리고도 없다. 기계 탓을 할 수 없으니 사람 탓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충돌도 잦고.
기계랑 편히(?) 일하는 길을 버리고 왜 여길 왔지, 너무 힘든 날은 마음에도 없는 생각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곤 하는 것이 사람 사는 일상 아니겠어. 똘똘 뭉쳐서 의견도 나누고, 그러면서 빌드업하는 과정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싶다. 한 번 더 찍어달라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찍어주는 감독님, 조금만 고쳐달라면 졸려도 한 번 더 수정해주는 작가님, 그리고 그 외 모든 사람들이 있으니까. 기계는 안 해 주는 일들을 해주는 정겨운 사람들 말이다. 솔직히 이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기 힘든 것이 한국인의 정이지 않나. 나는 그걸 서울 한복판에서 느끼며 살고 있으니, 행운아 중의 행운아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