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
입소문을 타는 콘텐츠는 일부러 조금 늦게 보는 편이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아껴 보려는 심산이다. 웰메이드 작품들에는 "땡땡땡 안 본 눈 삽니다"라는 문장이 심심찮게 수반되는데, 그때마다 그 "안 본 눈"인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한 가지 부작용이 따른다. 몰아 보기 시작했다가 흥미를 잃으면 끝까지 클리어할 수가 없다는 점. 흥미를 잃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너무 괜찮은 다른 작품들이 나의 흥미를 앗아가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거나, 그냥 내가 흥미를 잃거나. <괜찮아 사랑이야>는 아직까지도 내게 전자의 이유로 다 못 본 드라마로 남아 있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후자의 이유로 마지막 회를 남겨두고 있다. 그래 솔직히 인정한다. 이러면 거의 다시 보게 될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한다는 걸.
그래서 <작은 아씨들>은 약간 급한 마음으로 봤다. SNS에서 이렇게까지 야광봉을 흔드는 작품이면 놓칠 수 없잖아!! 괜사나 우영우처럼 과거로 떠나보낼 수는 없지!! 라는 마음의 소리도 있었지만, 첫 회의 마지막 씬이 엄청난 극찬을 받은 영향이 컸다. 아니 단 한 회만에 이렇게 극찬을 받으시다니요. 역시 될 작품은 첫 회부터 되는 법인가요.
1. 여성 서사의 정석
그렇게 해서 단숨에 클리어한 이 드라마는 2022 여성 서사의 정석이었다. 여성이여 일어나라!! 따위의 거창한 멘트가 있다기보단 그냥 주인공도 여성, 서브도 여성, 악역도 여성이라는 점이 이 작품을 "여성 서사"라는 하나의 장르로 만든 것 같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대사들도 이런 구조에서 치니 상당히 느낌이 달라지는 마법. 지금껏 잘 없었던 장르여서 더 흥미로웠다고 생각한다.
2. 돈에 대한 이야기 최신판
여성 서사만 강조했으면 이렇게까지 잘됐을 리 없다. 아니 대체 이 드라마 뭔데?? 라는 말이 육성으로 여러 번 나올 만큼 계속되는 반전과 사건들이라니. 동시에 이 사건들은 결코 과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았다. 단 한순간도 루즈하지 않을 만큼 쫀쫀한 구성. 인류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돈에 관한 문제를 삶과 죽음까지 연관시켜 버무린 걸 어떻게 안 볼 수 있을까.
전래동화부터 현대의 드라마까지, 결국 권선징악은 디폴트로 깔려야 볼 만하다. 그렇지만 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뻔한 교훈으로 무장했다면? 다시 말해 "인주 인경 인혜 자매는 돈 욕심을 내려놓고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라는 결말이었다면? 재밌었을 리가 없다. 아니 어쩌면 철저히 외면당했을지도 모른다. "돈은 행복할 만큼 가지는 것이 옳다(물론 적법한 방법으로)"는 2022년형 관점을 감히 제시했다는 발칙함. 결국 이 점이 먹혔다는 것이 <작은 아씨들>의 성공 포인트 아닐까. IMF를 지나고 웰빙과 욜로의 시대를 거쳐 주식&코인의 늪에 빠졌다가 다시 현금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예금 상품을 찾아보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이 드라마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타지를 선물해 준 것이다.
PS.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돈, 돈, 돈을 아십니까>를 함께 봐도 좋다. 나는 <작은 아씨들>과 같은 기간에 봤는데, 일 년 전쯤 봤으면 좋았겠다 싶긴 하다. 너도 나도 주식 공부를 시작하는 그 기간에만 봤어도. 아니 그 조금 전에 미리 볼 수 있었더라면. 그만큼 지금 이 순간의 상황과는 내용적으로 거리감이 있지만, 기본적인 관념을 흥미롭게 이해하기엔 무리가 없다.
여기서 새로 깨닫게 된 사실은 이거다. 곤도 마리에의 정리가 그러하듯 개인의 재무 구조를 짜는 일도 인생을 가꾸는 데에 주효한 기능을 한다는 점. 그나저나 학교에서는 왜 이런 걸 알려주지 않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