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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제 Nov 14. 2022

그 시절 천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화양연화


마니아층이 있는 대상은 선뜻 취하기가 어렵다. 나도 마니아가 되어야 할 것만 같고, 마니아가 안 될 셈이라면 시작도 말아야 할 것 같고. 나에겐 왕가위가 그런 존재여서, 영화깨나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추천할 때마다 한 귀로 흘리곤 했었다. 왠지 몹시 심각한 얼굴로 인생을 고찰하며 담배 한 대쯤 뻐끔거려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잖아.


그러다 너무 밝은 얼굴로 홍콩영화 삼대장을 추천하는 한 피디님을 만났다. 미장센이니 오마주니 하는 말을 늘어놓으며 감독의 의도에 대해 논하는 대신, 왕가위 작품을 볼 때 참 좋았다며 그 몰입감과 감동에 대해 말해주던 사람. 오롯이 본인의 느낌을 말해주었기 때문에 마음이 열렸던 모양이다. 그래 그 유명한 작품들 나도 한 번 보자. 직접 내가 봐야 좋든 말든 판단할 수 있을 거 아니겠어?


보기 전엔 선뜻 손이 가지 않던 색감. 보고 나니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답답한 감정 대신 먹먹한 측은지심으로 이 엔딩을 지켜보게 한 것이 이 영화의 힘일지도.


화양연화에 대한 나의 감상은 "신기함" 이라는 단어로 일축할 수 있다. 어떻게 저 시대에 이런 깔끔한 영화가 나왔을까. 아무리 세련되어도 십수 년 이상이 지난 뒤엔 옛 것처럼 보이기 마련인데. 물로 적셔 누른 듯한 색감, 아주아주 긴 호흡의 슬로모션, 뜬금없이 시작되어도 듣게 되는 배경음악 같은 것들이 20년 후의 사람에게도 먹힐 것이라고 그는 예측했을까? 어슷하게 갈리는 앵글들, 목소리들, 시계 같은 오브제들. 가릴 얼굴은 가리고 보여줄 얼굴에만 집중하는 방식이, 비 오는 가로등 골목에서 반복되는 인물의 행동들이, 대단히 천재적으로 읽힐 것이라고 과연 생각했을까?


화양연화 리마스터링. 진정한 걸작은 긴 시간이 지난 뒤에도 사랑받는다.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의 머릿속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다.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의 천재도 신기하지만, 먼 훗날의 사람들까지 설득시킬 수 있는 언어적 방식의 천재에겐 깊은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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