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12 언저리의 기록
#1
설 연휴 마지막 날. 정오쯤 출근하여 새벽 두 시쯤 퇴근했다. 이런 출퇴근 전시가 참 의미 없다는 것을 알지만, 회사와 조금 거리 두기로 마음먹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유독 근무시간이 크게 느껴진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인생의 첫 번째 목표임을 잊지 말자고, 올해에는 방점을 제발 회사 밖에 찍자고, 어차피 저녁이 없는 삶이라면 밤이나마 사수하자고, 그렇게 다짐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
뭐 하루쯤 실패해도 괜찮다. 솔직히 말하면 오늘도 실패할 것 같다. 도저히 기한을 맞출 수 없으니 오늘만 새벽을 좀 쓰자, 하며 해가 뜰 때쯤 회사 수면실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겠지. 뭐 그래도 괜찮다. 한 번에 성공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이렇게 살아온 시간이 있는데. 갑자기 바뀌는 것도 이상하다. 회사와 조금 떨어져 지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여 버둥거려야만 겨우 한 뼘 멀어질 테니, 버둥거리기로 결심했다는 것만 해도 무척 긍정적이고 유의미한 변화인 것이다. 숫자로 보이는 출퇴근 시간이 단숨에 바뀌진 않겠지만, 내 삶을 찾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자투리 시간의 활용 방향이 달라졌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며 스스로를 칭찬해 본다. 출근 전, 책을 읽고 강의를 보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하루 단 몇십 분 갖는 것만으로도 눈앞에 쌓인 일거리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 않나. 마치 회사 바깥 어딘가, 좀 더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산 위에 올라 내려다보는 것마냥 상쾌한 기분도 든다. 시간을 내어 가족들에게 따뜻한 연락을 하면 한 뼘 더 나아지는 기분. 회사에 매몰되지 않은 느낌과,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안정감이 제법 괜찮다.
심지어 집중력도 조금 높아진다. 오랜만에 본가에 왔다는 동생이 좋은 술 마시자며 기다렸던 설 전날, 시사 직전만큼이나 높은 효율로 수정을 마치고 눈썹 휘날리며 달려갔더랬다. 일 년에 다섯 번도 채 모이지 않는 가족과의 술자리인데. 나를 위해 자정까지 기다려 준 가족과 즐겁게 먹고 마신 기억으로 또 눈앞의 시간들을 살아갈 거다.
#2
이전 회사가 사라졌다. 제작팀이 속한 스튜디오가 사라진다 사라진다 말은 무성했지만, 이직하며 나오고 나서도 한동안 잠잠하길래 뭔가 새로운 도약을 하려나 기대했더랬다. 가까이 일하던 한 팀장님이 보내준 기사를 보고서야 실감이 나서, 아직 남아 있던 선후배들과 동료들에게 인사를 보냈다. 저마다의 꿈을 안고 들어온 회사였는데. 일을 시킬 후배가 아닌, 함께 일하는 동료로 존중하는 선배들이 있는 곳이었는데. 합리적으로 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꺼이 보여주는 직원들이 가득한 곳이었는데. 회사가 공중분해되는 걸 겪는 기분은 뭘까. 한 발 먼저 나온 것이 다행일지 어떨지 지금 판단할 수는 없지만, 끝까지 버틴 모든 분들에게도 버틴 것이 다행인 일이 벌어지면 좋겠다.
#3
중간 연차를 잊고 있었다. 팀원들을 두루 살피는 것이 지금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역할인데, 막내들과 그 바로 위 친구들은 관심을 갖고 바라보고 있었으면서 중간 연차를 간과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선배인 그들이 어쩌면 가장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셈인데. 어떤 일을 줘도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내가 그랬듯이 오히려 기댈 사람이 없어 외로울 수 있을 텐데. 저 정도 되었으면 알아서 잘하겠거니 여겼던 걸 조금 반성했다.
누구 하나 버티다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바쁜 시기가 코앞이다. 내가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있는 위치는 아니지만, 힘들어도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 마땅한 사람들에게 안 괜찮은 모습을 보일 대상 정도는 되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