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두 번째, 쇼생크 탈출

예술을 느끼는 마음 그리고 자유

by Nick



쇼생크 탈출의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아내를 죽인 오명을 쓰고 감방에 들어온 잘 나가는 은행가 듀프레인이 감옥에 적응하며 살아가다 자신의 오명을 풀어줄 인물을 만났지만 실패로 돌아간 뒤 감옥을 탈출하는 스토리이다. 간단하고 군더더기 없는 영화이다. 감정 호소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울림은 확실한 영화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돈, 명예, 권력, 사랑 또 무엇이 있을까?

감히 꼽자면 ‘자유’ 일 것이다.

사랑 안에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폭력이다.

돈 안에 자유가 없다면 노예가 될 것이다.

명예 안에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명예가 아닐 것이다.

권력 안에 자유가 없다면 집착으로 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에게 자유는 다른 감정을 압도하고 혹은 감정을 흩트리지 않게 만들어준다. 억울하게 오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온 듀프레인에게 자유로운 순간이 찾아온다. 듀프레인은 교도소 도서관 설립을 위해 주의회에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어느 날 주의회에서 얼마의 돈과 함께 책을 보낸 것이다. 기쁨에 찬 듀프레인은 당장 정리하라는 교도소장의 폭력적인 언어는 신경 쓰지 않는다. 교도관이 자리를 뜬 뒤 책을 정리하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LP를 찾게 된다. 순간 듀프레인의 눈동자는 자유를 갈망하는 한 인간의 눈동자로 변모한다.


인간이 꼭 가져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가벼운 마음 또는 예술과 지식을 통해 가벼워진 마음이 그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니체>



마침 교도관 방에는 턴 테이블이 있다. 이 순간 듀프레인은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가 아니다. 자유로움을 되찾은 숭고한 인간이다. 음악을 들으며 자유로움을 느끼던 듀프레인은 자신이 가진 자유를 나누고 싶어 한다. 그리고 기계를 조작해서 쇼생크 감옥의 모든 죄수들이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다 같이 들을 수 있게 한다.


그는 쇼생크 감옥에서 한낱 죄수로 살아가지만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일탈은 그저그런 일탈 행위가 아니다. 자유를 되찾은, 가슴 속 희망을 버리지 않은 숭구한 인간의 행위이다.


음악은 가슴속을 뜨겁게 하고 온 몸을 떨리게 만든다. 그런데 슬프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삶이 고달프고 마음속 여유가 없는 이들이 게는 음악은 그저 소음으로 들릴 뿐이다. 혹은 음악조차 자극적인 음악을 듣게 될 뿐이다. 그들은 세상이라는 큰 쇼생크 감옥 속에 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순간의 자유에 대한 대가는 크다. 듀프레인은 한 달 동안 독방에 갇히게 된다. 그렇게 대가를 치르고 동료들과 식사 자리에서 듀프레인은 말한다.


“나의 몸은 갇혀있었지만 정신은 모차르트와 함께였지.”

“뭐야? 말도 안 돼. 거기서 어떻게 음악을 느낄 수 있어? “

“여기 나의 가슴, 나의 머릿속에 모차르트 함께 했어.”


자신의 가슴과 머리를 가리키며 듀프레인은 더더욱 자유를 느꼈다고 말한다. 사실 자유로움은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있다.


100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어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있는 반면, 10평짜리 원룸에 살아도 자유로움은 무한할 수 있다. 이것을 느끼고 찾으려면 인간답게 살아가야 한다. 감옥에 살아가는 듀프레인조차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런데 절친한 친구 레드는 현실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상적이고 몽상에 빠져있는 듀프레인에게 레드는 일침을 가한다. 그렇게 살아가면 너만 힘들다고 조언한다. 레드의 현실적인 조언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그게 가능하겠어? 현실적으로 생각해봐.’

‘그런 생각은 어릴 때나 가능한 거야. 이제는 어른이잖아.’


현실을 대변하는 레드에게 듀프레인은 희망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희망은 아무도 빼앗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만의 것이라고. 그런데 현실을 대변하는 레드에게는 허무맹랑한 소리일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그렇다. 자유로움보다는 안정을 추구한다. 이상보다는 현실을 추구한다. 그런데 안정적인 것의 기준은 어디까지 일까? 당장의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면 안정이 왜 필요할까? 이상적임이 없이 현실적임이 가능할까?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정신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데도 진리를 빼앗긴다.”
이 말은 정의와 절제와 선의를 비롯한 그런 종류의 모든 미덕들에도 적용된다. 이것을 마음에 새겨두고 늘 기억하라. 너는 모든 사람을 더 온유하게 대하게 될 것이다.



이상주의자 듀프레인과 현실주의자 레드의 피 튀기는 대화는 관객에게 시선을 보낸다. 그들의 대화 장면이 따로 나오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모습에서 관객을 설득하는 여지를 주는 것일 수 있다. 현실에서 현실주의자에게는 듀프레인의 시선이, 현실에서 이상주의자에게는 레드의 시선이. 그렇게 관객은 그들의 대화에 참여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현실적인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현실적일까? 현실적임이 극단적으로 가게 되면 무언가에 길들여지게 된다. 다양한 현실적임 속에서 인간은 길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오랜 감옥 생활로 길들여진 브룩스처럼 말이다.


한평생 감옥에서 살아온 브룩스는 복역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그에게 세상은 현실이 아니다. 몽상적이고 어렵기만 하다. 듀프레인처럼 가슴, 머릿속에 희망을 지니면서 자유를 갈망하지 않았기에 그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외롭기만 하다. 그에게는 감옥이 이상적이 세상이고, 사회는 현실적인 세상인 것이다. 그의 가슴속에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 마리의 동물과 같다. 그렇기에 사회 속에 적응하지 못한 채,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공원에서 비둘기에게 모이 주는 일뿐이다. 동물처럼 살았기에 자유로운 인간과 어울릴 수 없는 것이다.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매우 중요하다. 한평생 열심히 살았지만, 뒤 돌아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열심히 살아온 것과 듀프레인처럼 자유를 포기하지 않은 인간은 무척이나 다르다. 희망과 자유 그것은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뜨거운 감정을 손에 놓지 않아야 한다.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대가를 치를 것을 알면서도 ‘피가로의 결혼’을 집어 든 듀프레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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